무령왕릉, 7호분 벽돌무덤, 양나라로 부터 들여온 굴식벽돌무덤이다.
무령왕릉 (武寧王陵)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 가운데 7번째로 발견된 고분으로, 백제 무령왕과 그 왕비의 능이다. 1971년 7월 7일 처음 발굴되었다. 지석이 발견되어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삼국 시대 고고학 편년연구의 기준 자료가 되고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금제관식, 금제뒤꽂이, 금제 심엽형이식(귀걸이), 지석, 석수, 청동신수경 등을 포함하여 총 2900여 점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국립공주박물관이 대부분 보관하고 있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사적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는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옛지명 : 송산리)이다.
송산리 고분군과의 관계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에 속해 있으며 고분군 내의 7호분 무덤이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무덤은 현재 총 7기가 있다.
1~5호분 : 백제 굴식 돌방무덤
6호분, 무령왕릉(7호분) : 벽돌무덤
무령왕릉의 구조
무령왕릉은 송산리(宋山里)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封土)를 접하고 있다. 송산리 고분의 1~5호분은 깬돌을 쌓아 만든 반원 굴식 돌방무덤이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굴식 벽돌무덤이다. 돌방무덤은 한성도읍기부터 시작된 무덤 양식이며, 벽돌무덤은 6세기초 중국 남조 양(梁)나라로부터 들여온 무덤양식이다. 봉분의 윗부분은 지름 약 20m의 구모양을 하고 있으며, 널방(墓室)의 바닥면에서 무덤 꼭대기까지 높이는 7.7m이다. 널방은 연화무늬 벽돌과 글자가 새겨진 벽돌 등으로 쌓여진 하나의 방으로 북쪽을 축선(軸線)으로 평면이 4.2m × 2.72m로 되어 있다.
천장은 아치 모양이며 바닥면으로부터의 최고값은 2.93m이다. 벽면에는 제6호분과 똑같은 모양의 소감(小龕)과 그 아래에 연꽃모양 창모양으로 된 것을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를 만들고 각 감 안에 등잔이 들어간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고분으로서 전례 없이 풍부하고 화려하다.
무덤 양식
무령왕릉의 아치형으로 벽돌로 쌓은 벽돌무덤으로써 중국 남조에 속하는 남경을 수도로 한 양나라의 무덤의 양식과 유사하다. 중국 양서 백제전에 백제가 기술자와 화공들을 백제로 들여갔다는 기록도 있어 무덤의 축조에 양나라의 기술자들이 동참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발견된 벽돌에는 양나라 관청에서 만든 벽돌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라는 의미의 '양관와위사(梁官瓦爲師矣)'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남경에 있는 제가산 남조묘들과 무령왕릉의 양식이 매우 흡사하다. 무덤의 양식은 보수성이 강해서 쉽게 바뀌지 않는데 무령왕릉은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이를 통해서 무령왕시대에는 백제가 양나라와 긴밀하게 교류를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굴 경과
1971년 7월 5일 송산리 5, 6호분의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벽돌무덤 1기가 발견되었다. 무덤입구는 벽돌과 백회로 빈틈없이 밀봉되어 있었고,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
7월 7일 무덤의 아치형 입구를 발견하였다. 호우가 내리기 시작하였으므로 자정까지 배수로를 팠다. 7월 8일 날이 밝자 발굴을 다시 시작하여 오후 3시경 입구를 막는 벽돌의 바닥까지 발굴을 하였다. 위령제를 지낸 후 4시경에 입구를 막는 벽돌 하나를 들어내자 하얀 연기가 나왔다. 계속해서 벽돌을 들어내자 널길의 중앙에서 돌짐승을 발견하였다. 무덤의 입구를 열었을 때 왕과 왕비의 지석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석에는 백제 무령왕과 왕비가 돌아가셔서 이곳 대묘에 안장했다는 내용이 수려한 남조풍(南朝風) 해서체로 새겨져 있었다. 1442년 만에 무령왕과 왕비의 실존이 밝혀졌다. 이후 발굴팀은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왕릉의 발굴을 발표하였다. 이후 혼란 속에서 밤을 세워 유물을 수습하였다. 이와 함께 기자들에게 내부를 공개하면서 본래의 모습이 훼손되어 이후 성급한 발굴과 공개였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호우로 인하여 8일 밤새 발굴이 이루어졌다.
최초 무덤 내부 상황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이다. 연도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 오수전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다. 지석 뒤에는 돌로 만든 짐승(石獸 : 석수) 모양이 남쪽을 향해 서 있었다.
묘실의 관을 올려 놓은 대위에는 왕과 왕비의 관을 만들었던 나무 조각이 가득 놓여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용하였던 장신구와 몇 점의 부장유물이 출토되었다.
중요 장신구류로는 금제관식, 금제이식, 금은제 허리띠, 금동장신발, 은제팔지 등이 있고 왕의 허리에서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봉문대도가 출토되었다.
그 밖에 왕과 왕비의 베개 및 발받침가 목관 안에 놓여 있었고 그 외에 중요 부장품으로는 청동거울 3면과 은제탁잔 등이 출토되었다
공주 10경
공주문화원, 공주예총, 향토사학자, 언론인, 사진작가 등으로 구성된 공주 10경 선정위원회에서 선정한 공주 10경 후보지 15개소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최종 공주 10경에 무령왕릉이 선정되었다.
☞ 연관글
[역사보기] - 무령왕, 사신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강화하고 백제의 문화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