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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화평, 전두환의 최측근 중의 한사람으로 12.12 사태에에 참여 정권을 찬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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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화평, 전두환의 최측근 중의 한사람으로 12.12 사태에에 참여 정권을 찬탈하다.

 

허화평(許和平, 1937년 10월 15일 ~ )은 대한민국군인정치가이며 사회평론가 및 시민사회단체인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된 뒤 19년간 군인으로 복무하였다. 장세동, 허삼수, 허문도 등과 함께 전두환의 최측근 중의 한사람으로 전두환·노태우 등과 함께 12·12 쿠데타에 참여, 정권을 찬탈하였다.

제5공화국 출범 직후 연좌제 폐지, 학생 두발 자율화, 불법과외 금지, 야간 통행금지령(통금령) 폐지를 기획, 성사시켰다.

1961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으며,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후 대통령 비서실 보좌관, 정무수석비서관 등을 지냈으며, 두발자율화와 연좌제 폐지를 주도하고, 장영자 사건 당시 엄벌을 주장하였다. 1983년 도미, 미국 헤리티지 연구소 객원연구원과 수석연구원을 지냈으며, 5공 이후 1988년 현대사회연구소 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을 연임하였다. 제5공화국 당시 5공 실세의 한 사람으로도 불렸다. 본관은 김해(金海)다. 자는 봉우(鳳宇), 호는 우민(佑民)이다. 경상북도 출신.

 

생애 초기

1937년 10월 15일 경상북도 영일군 장기면 계원리에서 출생하였고, 경상북도 영일군 포항읍 용흥리에서 성장하였으며 일대는 그의 일가가 사는 집성촌이었다. 포항국민학교포항중학교,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1년 2월 육군사관학교를 17기로 졸업하고 1961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군사주특기는 정보 병과였다. 그밖에 1975년부터 1976년 대한민국 육군대학을 수료하였다.

 

장교 복무

육군 제15보병사단 수색중대 소대장과 육군 제1군단 작전처 교육장교를 거쳐 1963년 제1공수특전단 게릴라전 교관을 지냈다. 당시 그의 계급은 중위였고 이때 그는 소령이었던 전두환을 처음 만나게 된다.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가 귀국, 1968년 보안사령부에 배속되었다가 이후 육군 제9보병사단 대대장, 1977년 육군 제9보병사단 작전참모, 정보사령부 특검단 검열담당관, 1979년 국군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군내 사조직 "하나회"의 멤버이기도 하다.

 

12.12 쿠데타

전두환,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회원으로서 1979년 3월 육군 대령으로 재직 중 전두환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 되었고, 10.26 사태 이후 전두환을 도와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범 수사를 지원하였다. 같은 해 12월 신군부를 중심으로 한 12·12 사태에 가담하였으며 1980년 5·17 비상 계엄에도 참여하였다. 그 뒤 1980년 9월 9일 대통령 보좌관이 되고,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12.12 쿠데타5.17 비상 계엄 당시 허삼수, 허문도, 장세동 등과 함께 전두환을 최측근에서 보좌하였다.

 

평가

제5공화국 출범 전 허화평은 허삼수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령부 대공처장 등과 함께 '보안사 3인방'으로 불렸으며, 전두환의 집권 시나리오를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전두환 본인은 집권 계획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다만 광주사태 직후 혼란이 오게되고 다들 전두환의 등을 떠밀어서 5공화국이 출범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하극상을 일으킨 타락한 군인의 변명일뿐, 허화평을 포함한 하나회 12.12 세력들은 상관인 정승화 육참총장을 대통령의 사전 승인 없이 체포하는 것을 계기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정권을 찬탈한 뒤에는 기업인들로 부터 정치자금을 갈취하거나 혈세를 개인적으로 유용하는 등 비리도 심각하여, 전두환 등은 법원으로 부터 2205억원으로 추징금을 선고 받기도 하였다. 5공 세력들의 일련의 악행들은 역사적 고증을 거쳐 MBC 드라마 "제5공화국"으로 방영되기도 하였다.

그는 김대중김영삼이 없었다면 5공화국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박정희라는 절대 권력자가 쓰러지자 YS와 DJ는 자기들 세상이 왔다고 생각하며 최규하 정권을 유신의 잔당으로 얕잡아 봤다, 무정부주의를 구사한 그들이 최규하 정부를 너무 압박해 군부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며 "YS와 DJ가 욕심 내지 않았다면 5공은 탄생하지 않았을것"이라며 12.12와 5.17 비상계엄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논란

그는 "12.12 당시 자신은 군인이자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서 소임을 다 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광주사태 피해자들의 용서 없이는 사과도 없다"고 못박았다. 이 발언으로 진보적 성향의 시민단체들로부터 비난이 빗발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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