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돈화문
돈화문은 태종12년에 처음 지어졌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 되었습니다.
돈화는 [중용]의 '대덕돈화'에서 가져온 것으로 '큰 덕은 백성들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 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돈화문은 처음에는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어요. 문종 때 돈화문을 고치라는 왕명이 있었고 연산군 때 크고 높게 고치라는 왕명이 있었습니다. 창덕궁이 차츰 이궁에서 본궁의 구실을 하게 되자 정문을 보다 크고 위엄있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 거라는 풀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궁궐의 정문이 3칸인데 비해 돈화문은 5칸이고 이층으로 크고 높게 지어졌습니다. 경복궁과 창경궁의 정문이 정전과 일직선상에 있는 것과는 달리 창덕궁의 돈화문은 정전이 동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지형에 맞게 지어진 궁궐이기 때문입니다. 궁금한 점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종13년 돈화문에 무게 1만5천근이나 되는 동종을 걸었다는 글이 있는데 왜 정문에 종을 걸었고 어떤 구조로 그렇게 무거운 종을 걸 수 있었는지 입니다. 태종 때의 건물을 불타 없어졌으니 알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회화나무
창덕궁 돈화문을 들어서서 관람로 양 옆을 보시면 오래된 나무가 보입니다. 이 나무는 회화나무에요. 보기만해도 멋있게 뻗어있죠?
나란히 자라고 있는 회화나무 8그루는 특별한 사유를 가지고 심은 것으로 300~400여년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돈화문 주변은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외조의 공간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주례]에 따르면 외조의 공간은 왕이 삼공과 고경대부, 여러관료와 귀족들을 만나는 장소로 이 중 삼공의 자리에 회화나무를 심어 삼공 좌석 표지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화문 주변에 회화나무가 심어졌고 궁궐 이외에도 학식높은 선비가 사는 마을에는 회화나무가 심어져 학자나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인정전 서편 궐내각사
회화나무를 지나 인정전 서편으로 보면 많은 건물들이 보입니다. 이곳은 궐내각사입니다. 궐내각사란 조선왕조의 관청 즉, 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관원들의 관사로 궁궐안에 지어진 건물을 말합니다.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 옥당, 예문관이, 서편에 내각, 봉모당, 규장각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왕 가까이에 궐내각사를 지은 것이죠.
규장각
궐내각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들어가면서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규장각입니다.
정조는 즉위한 해 1776년 3월에 규장각을 궐내에 설치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역대 선왕들의 책과 어필, 서화 등을 함께 보관하기 위해서였지요. 규장이란 바로 임금의 어필과 어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처음에 규장각은 창덕궁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당 옆 언덕에 지어졌습니다. 2층으로 1층이 규장각이고 2층 누각이 주합루였습니다. 규장각은 학문기관이자 자문기관인 동시에 정조 임금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고주합루는 열람실로 사용되었습니다. 정조는 당파나 신분에 구애없이 젊고 참신한 인재들을 규장각에 모아 개혁정치의 파트너로 삼았습니다. 서얼이었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을 적극 등용했습니다. 정조는 규장각에 힘을 실어주기위해 아래와 같은 현판을 직접 내려서 규장각 신하들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객래불기(客來不起: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말라)
각신재직대관좌의(閣臣在直戴冠坐椅: 각신은 근무 중에는 반드시 관을 쓰고 의자에 앉아 있으라)
범각신재직 비공사무득하청(凡閣臣在直 非公事毋得下廳: 각신은 근무 중에 공무가 아니면 청을 내려가지 말라)
수대관문형 비선생무득승당(雖大官文衡 非先生毋得升堂) :비록 고관 대신일지라도 각신이 아니면 당 위에 올라오지 못한다.
규장각에는 관원 6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각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각신은 임금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는 사관으로 임금과 정사를 토론하고 책을 편찬하는 일을 했습니다. 정조는 규장각 신하들을 무척 아껴 후원으로 불러 잔치를 베풀기도 했습니다. 정조 임금 사후에는 왕실 도서관 기능만 남게 되었고 고종5년에 지금의 인정전 서쪽 궐내각사 쪽으로 옮겨졌습니다.
검서청
규장각 옆쪽에는 검서청이 있습니다. 검서청은 규장각의 검서들이 당직하던 규장각의 부속건물입니다. 검서청에 검서관 4명을 두었는데 임금의 갑작스런 질문에 대비하여 검서관들은 밤새 입직했습니다. 주로 뛰어난 자질을 갖춘 서얼들이 등용되었는데 초대 검서관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이 임용되었습니다.
선원전
선원전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로 궁궐 밖으로는 종묘를 두었고, 궁 안에는 선원전을 두었다고 합니다. 원래 춘휘전이었던 건물을 조선 효종 7년(1656) 광덕궁의 경화당을 옮겨지어 사용하다가, 숙종 21년(1695)에 선원전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곳에는 숙종·영조·정조·순조·익종·헌종의 초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1917년 창덕궁에 대화재가 일어났을 때 일제에 의해 인정전에서 멀리 떨어진 창덕궁의 북서쪽에 신선원전이 새로 지어졌습니다. 일제는 선원전이 임금에게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인정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다시 지었던 것입니다. 1921년 창덕궁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왕의 초상을 옮긴 뒤부터 원래의 선원전은 구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새로 지은 선원전에 옮긴 왕의 초상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구조적으로 간결하고 불필요한 장식을 꾸미지 않은 건물로, 조선시대 왕실 제사용 건물의 유례를 볼 수 있는 중요한 건물입니다.
약방
조선시대 궁중의 의약을 담당한 관청으로 세종 때 내의원이라 칭했습니다. 내의원에는 내의녀가 포함 되어 있었고 약방의 책임자는 도제조와 제조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5일마다 의관과 함께 왕을 문안하여 진찰했습니다. 내의원에서는 약 뿐만아니라 차도 달여서 올렸는데 한강 가운데서 물을 길어다가 은으로 만든 탕관에 달여서 왕에게 바쳤습니다. 순종 때 창덕궁이 개조되면서 약방이 헐려 성정각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정각이 내의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옥당
옥당은 조선시대 삼사의 하나인 홍문관입니다. 조선시대 궁중의 경서, 사적의 관리,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 본 관청입니다. 학문적, 문화적 사업에 주도적 구실을 한 기관입니다. 다음은 창덕궁의 금천교, 진선문, 인정문, 인정문 주변의 궐내각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출처 : 궁궐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