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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왕, 구이신왕의 맏아들, 대 고구려 압박 외교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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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왕, 구이신왕의 맏아들, 대 고구려 압박 외교를 하다.

 

비유왕(毗有王, ? ~ 455년, 재위 : 427년 ~ 455년)은 백제의 제20대 국왕이다. 휘는 비유(毗有) 또는 비(毗)이고, 송서 이만전 백제조(宋書 夷蠻傳 百濟條)에서는 여비(餘毗)로 나와있다. 구이신왕(久爾辛王)의 맏아들이다. 《삼국사기》는 전지왕의 서자라는 설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용모가 아름답고 언변이 좋았다고 한다. 그의 다른 이름은 곤유왕(昆有王), 피류왕(避流王)이다.

 

치세

427년부터 455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427년부터 이듬해 428년까지 해충이 섭정하였고 428년부터 454년까지 친정하였으며 454년부터 이듬해 455년에 붕어할 때까지 아들 경사대리청정하였다.

 

생애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장남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구이신왕의 장남이라 하고, 삼국사기에는 구이신왕의 장남이라는 설과 전지왕(腆支王)의 서자라는 설이 있지만, 전지왕 서자 설은 분명치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구이신왕의 아들로 등장한다. 일본신찬성씨록에 의하면 백제 비유왕을 시조로 받드는 성씨로는 불파련(不破連)씨와 비조호조(飛鳥戸造)씨가 있다 한다. 일본에서는 그를 비유왕 또는 곤유왕, 피류왕으로도 부른다.

구이신왕이 반란중 죽자 왕위에 올랐다.

429년(비유왕 3년), 남조의 송나라에 조공 하였고, 상좌평 부여신(扶餘信)이 죽자 전지왕 때의 외척이었던 해(解)씨 가문의 해수(解須)를 새로운 상좌평으로 임명했다.

이듬해인 430년(비유왕 4년)에는 송나라가 전지왕에게 내렸던 작위를 계승하는 것이 허락이 되었고,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使持節 都督 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 百濟王)으로 책봉이 되었다.

433년(비유왕 7년) 신라에 사자를 보내 화친을 요청해, 선물의 교환을 통해서 양국의 수호가 성립하여, 120년 뒤인 553년(성왕 31년) 신라의 진흥왕에게 배신당하기 전까지 동맹 관계가 이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 남조 송나라, 신라, 왜국의 협조 체제를 가지고, 북조, 북위와 연결한 고구려에 대항하는 태세로 만들었지만, 455년 9월에 사망했다.

 

사인

비유왕의 사인(死因)은 반란으로 추정되는데, 《삼국사기》에는 비유왕 대의 반란 기사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으나, 왕이 죽기 직전에 흑룡(黑龍)이 나타났다는 기사가 있는 등 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부분들이 있다.

왕이 죽은 직후(455년 10월)에 고구려가 백제에 침입했을 때에는, 신라에서는 백제를 구원하는 군이 파견되었다고 하였다.

비유왕이 목표로 하고 있던 대(對)고구려 압박 외교는 성공한 치적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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