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왕, 동진, 아신왕의 맏아들, 일본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다.
전지왕(腆支王, 390년?~420년, 재위: 405년~420년)은 백제의 제18대 국왕이다. 휘는 영(映) 또는 전(腆) 또는 여영(餘映,余映)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직지왕(直支王), 《삼국유사》왕력에서는 진지왕(眞支王), 또 《한원》에 인용되는 《송서》, 《통전》에서는 부여전(夫餘腆)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신왕의 맏아들이다.
일본에 있던 중 405년 아버지인 아신왕(阿莘王)이 붕어하자 첫째 숙부 부여훈해(扶餘訓解)가 임시 섭정을 맡았으나 막내 숙부 부여설례(扶餘碟禮)가 부여훈해(扶餘訓解)을 시해하고 후임 임시 섭정을 맡고 있었는데 해충(解忠)이 부여설례(扶餘碟禮)를 몰아내어 주살한 후 백제에 도착한 전지왕이 16세에 보위에 오르자 405년부터 408년까지 해충(解忠)이 섭정을 맡았고 408년부터 420년까지 천정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아신왕이 죽자 학자 아직기가 일본에서 귀국하여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어 아직기가 전지왕이라는 학설도 존재한다.
생애
《삼국사기》 의 아신왕, 전지왕 본기에 의하면 394년(아신왕 3)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아신왕이 죽고 아신왕의 첫째동생 부여훈해가 섭정을 맡고 있었는데 백제 왕실에서 내분이 일어났다고 한다. 일본에서 귀국하는 도중에 전지왕은 신하 해충(解忠)에게서 백제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을 알고 섬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 뒤 해씨 세력은 백제에서 섭정 부여훈해를 시해하고 후임 섭정을 사칭하여 내분을 일으킨 부여설례(아신왕의 막내아우)를 죽이면서 전지왕을 즉위시키고, 그 이후에 전지왕이 백제에 들어온 것으로 파악된다.
이복 동생인 부여신 등 다른 형제들이 몇 명 더 존재하였다.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 의하면 그는 아신왕 재위 중 일본에 보내졌다 한다. 일본서기제10권 오진 천황조에 의하면, "405년 9월 아화왕(아신왕)이 서거하다. 천황이 직지(전지) 왕자를 불러 이르기를 "그대는 백제로 돌아가 왕위를 계승하라."고 하였다." 한다. 그는 오오진 천황이 내준 왜의 군사들을 대동하고 귀국, 설례 일파를 제거하고 16세에 왕위에 올랐다. 이 부분이 아직기가 전지왕이라는 근거이기도 하다.
전지왕은 즉위하고 나서 자신에게 도움을 준 해충을 섭정으로 임명했고 1년 후인 406년(전지왕 2) 섭정 해충을 달솔(達率)로 임명했으며, 한성의 벼 1천 석을 하사했고 408년부터 친정 체제를 시작하였다.
또한 이듬해인 407년(전지왕 3)에는 이복동생인 부여신(扶餘信)을 내신좌평(內臣佐平)에 임명하는 한편, 해씨 가문의 해수(解須)와 해구(解丘)를 각각 내법좌평(內法佐平),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임명하였다.
408년(전지왕 4), 부여신에게 새로운 관직인 상좌평(上佐平)을 겸하게 하여 해씨 세력을 견제하도록 했다. 417년(전지왕 13) 7월에는 동부와 북부 2부의 15세 이상 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구성(沙口城)을 쌓게 하고 병관좌평인 해구를 시켜 이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420년(전지왕 16) 3월에 향년 31세로 죽었고, 아들 구이신왕이 즉위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아신왕이 죽자 직지왕(直支王)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어 아직기가 전지왕이라는 학설도 존재한다.
외교
동진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416년에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 백제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일본과의 우호 관계역시 긴밀히 하여 야명주를 보내온 일본의 특사를 후히 대접한 뒤 비단 열 필을 사은품으로 보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晉나라(265~420)말기에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 역시 遼西와 晉平땅을 거점삼아 백제군을 두었다.
<梁職貢圖> 백제의 전지왕(405~420)과 동성왕(479~501)이 백제관리였던 장사나 사마를 중국 대륙에 파견했다 <宋書/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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