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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고대국가 성립 직전까지는 발전한 것으로 여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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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고대국가 성립 직전까지는 발전한 것으로 여겨지다.

 

대가야(大伽倻) 또는 반파국(伴跛國)은 경상북도 고령군(高靈郡) 지역에 있던 6가야 중 하나다.

 

이름 유래

대가야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후기 가야연맹을 이끌기 시작하면서부터로 추정되는데 "대가야"라는 이름 자체는 가야연맹 전체의 국명으로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가락국(금관가야)도 사용했다.

우륵의 12곡상가라도가 이곳인데 상가라도의 명칭이 가야의 수도라는 의미로 이 시기에 반파국 중심의 대가야가 어중간하게나마 중앙집권화된 고대국가로 이행했음을 시사한다.

 

건국 설화

시조 이진아시왕42년수로왕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와서 현재의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 대가야를 세웠다고 한다.

 

역사

당초에 고령지역사 [변한] 12국 중의 반로국(半路國, 반파국의 오기) 일본서기의 반파국(伴跛國)이었다. 반파국은 초기에 내륙 깊숙히 자리해 구야국 주도의 해상무역에서는 한발 물러나 있는 대신에 내륙 산간일대의 농업생산력과 옛 야로현(합천군 야로면)의 철광을 기반으로 주변 소국들을 점진적으로 복속시키며 발전하고 있었다. 400년가락국고구려-신라연합군에게 공격을 받아 거의 패망하다시피하자 고구려의 공격에 피해가 적었던 반파국은 가락국의 망명객들과 제철기술을 받아들이고 가야연맹의 맹주로 떠올라 대가야국을 세웠다. 초기에 전라도 동부지역-기문(己汶), 달이(達已) 물혜, 사타-로 진출해 가락국의 쇠퇴로 상실한 지금까지의 대외교역창구였던 고 김해만일대 대신에 새로운 교역창구로 다사강유역을 확보한 대가야는 479년에는 남제에 가야왕의 이름으로 사신을 보내고 481년에는 나·제연합군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는 등 최전성기를 맞았지만 이후 세력을 회복한 백제와의 분쟁에서 다사강 이서의 영역을 모두 잃는 것을 시작으로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해 신라와 백제의 압박으로 인하여 안라국 중심의 남가야 세력의 이반을 극복하지 못하고 가야의 분열을 초래한데다 554년 백제와 함께 신라를 침입했지만 크게 패하고 오히려 562년이사부 장군의 신라군의 침공으로 결국 멸망했다.

 

정치·경제·문화

전기 가야연맹과는 달리 반파국 중심의 대가야국은 반파국을 상가라도라 칭할 만큼 어느정도 중앙집권화에 성공해 고대국가 성립 직전까지는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상업이 중심이었던 구야국과는 달리 내륙산간 일대의 농업이 반파국의 경제의 기반이었지만 섬진강 유역을 장악한 이후 대외교역에도 적극성을 보여서 섭라지방(전라도 동부의 가야지역)의 옥(玉)을 고구려에 수출했고 고구려는 그 옥을 북위와의 교역에서 결제수단으로 사용했다. 후에 백제가 섭라를 장악해 가야의 고구려에 대한 옥 수출로가 막혔고 이로 인해 고구려도 북위에 대한 옥 납품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가실왕가야금을 제작하고 이를 토대로 우륵이 12곡을 만들어 음악을 정리하는등 문화 수준도 높았다.

 

역대 국왕

반파국 또는 대가야의 왕은 금관가야의 왕과 비교해 봤을 때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 존재했다고 했지만 확실하지 않다. 또한 일본서기 신공기에 기본한기(己本旱岐)라는 국왕이 나오지만 몇대인지 알 수 없다.

 

대가야의 국왕

이것은 확실하지 않은 기록으로 사서마다 다르게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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