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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각종 의혹, 박용만 계열 인사들은 이승만이 교포사회에서 잔악한 위험인물" 이라는걸 증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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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각종 의혹, 박용만 계열 인사들은 이승만이 교포사회에서 잔악한 위험인물" 이라는걸  증언하다.

 

독재자가 아니라는 견해

그가 독재자라는 견해에 대해 독재자는 아니라는 설이 있다. 그에 의하면 이승만은 권위주의적이고 독선적이기는 했지만 독재자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4.19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하지만 이 주장에 따르면, 자의든 타의든 물러나기만 하면, 어떤 가혹한 독재정치를 해도 독재자가 아니라는 모순이 발생한다.

허정에 의하면 '우리가 독재라고 부르는 그의 행동이 얼마나 엉성하고, 어설프고, 불철저했던가. 만일 그가 스스로 독재자가 되려고 결심했다면 그는 이렇게 불철저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리라고 믿는다. 독재자는 우남과는 다른 유형임을 이제 국민들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심신이 쇠약한 노령에 이르러 행정수반으로서의 과오와 실정을 저지른 바 없지 않았지만 그가 평소에 쌓은 공적과 대비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까지 주장하였다. '독재를 했더라도 공적이 있다면 독재자가 아니라'는 주장이지만, 독재는 정치행위의 특성을 지칭하는 것이지, 공적의 유무를 따지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윤치영은 이승만이 평소 '부정과 부패를 싫어하고 자유민주주의적 공명선거를 믿고 있었다며 이승만 몰래 자유당 측근들이 부정을 저지른 사실이 사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보고되자 깜짝 놀라, 그렇다면 학생과 국민이 일어선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며 자진해서 하야한 이박사 였다고 주장했다. 윤치영은 진상이 드러나자 '드디어 이승만은 4월 27일 행동으로 당신의 뜻을 보여주었다.'라며 이승만이 독재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원순은 '학생들의 의거가 한창일 때 그는 대통령 직위를 미련 없이 버렸다. 이런 것을 보면 그는 별로 명예욕이 강한 인물은 아닌 것 같이도 생각된다. 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견해는 이승만이 부정선거와 반민주적 사사오입 개헌으로 네 차례나 권력을 추구했으며, 그 과정에서 다수의 양민을 학살하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독립운동 할 때의 마인드

이승만이 독립운동 할 때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했다는 시각도 있다. 신익희는 이승만이 독립운동 할 당시의 주먹구구식 계산으로 정치를 한다고 했다. 1948년 7월 20일 초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다.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 직후 처음 방문한 신익희는 "우남께서는 을미사변, 을사늑약, 경술합방을 겪으시면서 해내, 해외에서 영토토 국민도 없이 유한한 몇몇 독립운동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하시느라 어렵고 위험한 형극의 길을 50여 기나긴 성상을 걷다가 반쪽일 망정 영토, 국민, 주권의 세 요소를 갖춘완전한 독립국가의 대통령이 되셨으니 그 감개무량함이 남달리 여타유별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천만 가지 모두가 청황이 부접하고요, 얼얼이 미정한 때에 깊은 근심과 짙은 걱정이 전보다 몇 배 더하실 것입니다. 하와이에서, 상해에서, 미 본토에서 독립운동하시던 그 때와는 판이하게 아주 다릅니다"라며 "국무총리 이하 각 부 장관만 학식과 능력, 그리고 덕망 있는 사람으로 골라서 맡기시고, 그 아래는 그 사람들로 하여금 골라서 임용하도록 권리와 책임을 주십시오. 우남장께서는 이열 한 부의 장관과 네 처장만 딱 거머쥐셔서 번적 들며 줄줄이 따라 올라오고, 내려 놓으면 모두가 내려 앉습니다. 이렇게 하셔야지 만일 그렇지 않고 만기(萬機)를 일일이 친자(親自) 총괄하시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아무리 기억력 좋고 영리한 사람이라도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더구나 우남장께서는 지금 나이가 연만하신 터수에 어려우시니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라고 진언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조용하게 듣고 있던 이승만은 신익희의 건의가 끝나자 벌떡 일어서 방안을 빙빙 돌면서 손을 입에 갖다 대고는 훅훅 불면서 "안 돼요, 믿을 사람이 누구란 말이오"하고는 국회의장실 한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 사무원을 가리키며 "저기 앉아 있는 사환들 까지도 내가 일일이 간섭해야 해요. 그래야 모든 일이 제대로 됩니다. 해공은 모르시는 말씀이야."라고 하였다. 신익희는 "우남 대통령 저 어른 큰일났다. 아직도 하와이의 사탕수수 밭에서 노무자로 이민간 무식한 교포들과 비서 몇 사람 데리고 일하시던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시니, 앞으로 정형(情形)은 어려워 질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 신익희는 그가 독립운동 할 당시의 마인드를 버리지 못했다고 하였다.

 

측근들의 부패와 오도

측근들이 그의 눈과 귀를 가렸다는 설도 있다. 이승만이 돈암장, 이화장에 있을 때부터 비서관이며 그의 비서실장을 지낸 윤치영이기붕의 수하들이 눈과 귀를 가리고 이박사를 속였다고 진술했다. 윤치영은 '가슴아픈 것은 면종복배판 측근들에 대한 이박사의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측근을 잘 못 기용했다면, 그 책임 역시 임면권자인 대통령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윤치영은 내무장관 최인규와 자유당 간부들이 부정선거를 획책했다고 하였다. 윤치영에 의하면 '선거전이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내무장관 최인규가 진두지휘하는 행정부의 부정선거 음모는 자유당 수뇌들과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실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행정관서와 경찰이 청중을 강제동원하는 전국 유세가 2월 27일 대구에 이르러 수성천변에는 역사상 초유의 군중이 자유당 집계로도 30만에 달하였다.'며 1960년 2월 28일 대구 시내에는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을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장면 후보의 집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등교케 했다. '최인규가 각급 행정관서와 경찰, 그리고 지방선거관리위원회에 내린 비밀지령은 이기붕 후보를 필사적으로 당선시키려고 무리를 담고 있었다'며 윤치영은 '이러한 부정선거운동의 양상을 보며 더군다나 장막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모른 채 당신의 평소의 소신과 철학대로 민주주의적인 절차가 잘 진행되고 있으려니 하고 믿고 있을 이승만 박사의 처지가 가엾고 통분할 노릇이었다.'고 했다. 윤치영은 노쇠한 이승만 대통령의 여생을 점치던 정상배와 협잡꾼들과 같은 기회주의자마저 끼어들어 벌써부터 논공행상에 여념이 없는 작태들을 노정시키고 있었다. 허정 역시 이승만이 소인배들의 농간에 희생되었다. 고 하였다.

장면은 이승만 측근들이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장기집권은 이승만의 뜻이 아니라 그 부하들의 농간이었다는 것이다. '그 분을 장기집권 시키기 위한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중석불 사건, 원면 사건, 연계 자금 사건, 산업 금융 채권 사건 등 추잡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국민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 는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음을 은연중에 인식했다고 한다. 윤치영에 의하면 1958년 이승만을 찾아갔을 때 '당신의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는 가운데 뭔가를 암시하는 듯 '철창에 갇힌 호랑이'에 비유해서 혼잣말처럼 독백하시던 일로 미루어 나로서는 여러 가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며 이승만이 뒤늦게 자신이 부하들의 농간에 놀아남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승만 우상화 논란

49년 3월 26일 중앙청 광장에서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9시에 기념식이 열렸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걸었다. 54년 9월 18일 교통부 광장에서 '철도창설 55주년 기념 이승만 대통령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56년 3월 31일 서울 탑골 공원에 이승만 동상이 설치되었다. 이승만의 8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24m 높이의 동상이 제작되었다. 56년 8월 15일 이 동상의 제막식에서 이승만에 대한 만세 삼창이 이루어지고 서울 하늘에서는 축하 불꽃 놀이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 동상은 4.19혁명 이후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철거되었다. 59년 10월 이승만의 얼굴을 넣은 100환 동전등 이승만을 소재로한 화폐 8종이 발행되었다. 서울 뚝섬의 '우남송덕관', '우민회관', '우남정'등 이승만의 호 '우남'이 들어가는 건물이 건축되었다. 부산 용두산 공원은 '우남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중앙대 도서관도 '우남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승만 하야 이후 이러한 기념물,건물등은 철거되거나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0년 한기총 나라사랑운동본부은 서울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이승만 건국대통령 동상 건립 소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을 갖고 “자유민주주의공화국의 정체성을 세우고 미국과 손잡고 태평양 기독교문화권을 형성한 우남에 대해 올바로 평가하고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사업을 펼치는 게 당연하다”고 밝혔다. 운동본부는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 건국 정신과 정통성 회복을 위해 이 대통령 기념사업과 동상 건립, 건국기념일 제정에 정부가 앞장서 줄 것을 촉구했다. 아울러 한국교회에는 동상 건립 모금운동과 서명운동에 적극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미국의 이승만 제거 음모설

3.15 부정선거 자체를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미국의 계략이라는 주장도 있다. 윤치영은 이박사의 빛나는 독립투쟁의 업적을 이 기회에 일거에 실추시키고 어부지리를 얻으려 하고 있다는 모측의 계획된 공작 이라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윤치영미국 국무성의 음모가 개입되어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3.15 부정선거 규탄 데모로부터 변질되어 이승만 박사를 기꺼이 하야하도록 만든 일관된 계략이 있었다고 의혹을 제기하였다. 윤치영은 '미 국무성의 이승만 제거작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나 안다고 해도 지금에 와서 그 진상을 자세히 밝힌다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 아닌가 싶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윤치영은 1950년대부터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공작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국민회 자금 유용 의혹

박용만과의 갈등 중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 활동에서 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끊임없이 받기도 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 온 초기부터 하와이 실력자이면서 군사양성에 열중하는 박용만을 맹렬하게 비난했고, 박용만 반대세력을 규합했다. 이승만은 대한인 국민회의 운영권 곧 회비관리권을 움켜쥐려고 온갖 공작을 벌였으나 쉽게 실현되지 않았다. 박용만은 다른 농장으로 군영을 옮겨가면서 군사훈련을 거듭했으나 두 사람의 대립은 그칠 줄 몰랐다.

1910년대 중반 무렵 일제는 밀정을 통해 박용만의 군사훈련 사실을 캐냈다. 주미 일본 대사관에서는 미 국무장관에게 이를 항의했고 국무장관은 하와이 총독에게 그 실정을 알아보게 했다. 1918년 박용만이 살인미수 혐의로 재판을 받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증언을 했다.

 

그는 미국 영토에 조선국민군단을 설립하고 배일활동을 하면서 일본군함 출운호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이는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짓이다.

 

박용만은 온갖 음모에 시달리면서 주도권을 잃어갔다. 이승만은 자금횡령 혐의로 대한인 국민회 간부들을 고소했고, 국민회 간부들은 법정에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서로 벌인 소송사건이 열 차례나 있었다. 국민회와 이승만파(동지회)가 서로 테러를 가하기도 하고 국민회 대포회의때 총격이 가해지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분쟁 속에서 마침내 국민회 주도권이 이승만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분쟁이 야기되는 속에서도 독립기부금은 잘 걷혀 1915년 1,523달러에서 해마다 늘어나 1918년도에는 3,775달러를 기록했다.

대한인 국민회 계열 재미 한국인들은 이승만을 두고 '협잡배'라 매도했고 돈을 너무 밝힌다고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이승만과 국민회가 독립자금 문제로 분란을 겪어 끊임없이 의혹을 받고 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족되자 국내외에 걸쳐 많은 독립자금이 들어왔는데, 1919년 미주의 국민회에서 임시정부에 송금한 내역을 보면 공식적으로 36,000달러였다고 한다. 다음 해 이승만도 많은 돈을 가지고 상하이로 왔는데, 1920년도에는 미주에서 200만 달러를 모금했는데, 이는 오늘날 가치로 보면 2억 달러가 된다..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발족한 뒤, 미주 동포들이 낸 독립자금은 구미위원부에서만 사용하고 임시정부로 보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독립자금 모금을 두고 다시 주도권 분쟁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박용만, 안창호 계열의 비판

박용만 계열 인사들은 이승만이 교포사회에서 잔악한 위험인물" 이라는걸 서슴없이 증언하고 있다.

'재미한인 50년사'를 저술한 김원용에 의하면 '이승만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파쟁과 모함과 비난과 재판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대한인 국민회와 별도로 자기를 지지하는 '동지회'라는 단체를 따로 조직해서 국민회와 적대관계를 지속하여 한인사회를 분열시켰다.'고 비판하였다.

1983년부터 하와이 이민 1세대 중 장금환의 딸 로베르타 장은 지금 살고 있는 하와이 이민 1세대를 상대로 인터뷰를 하였는데,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을 부정적 시각으로 증오하는 사람들과 긍정적으로 보는사람들 등등 각각 서로 반반씩 존재했었다. 이승만에 부정적 시각가진 이들은 대한인 국민회 철폐한것과, 자신의 부모를 죽이려고 든 기억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가정 생활

독립협회 활동과 수감, 미국 활동 등으로 아내와 친밀감을 가질 사이가 없었던 그는, 첫 아들인 이태산(이봉수)이 사망하면서 아내 박씨와 이혼하게 된다. 박씨부인과 이혼 후 오랫동안 혼자 살았으며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1930년 미국 워싱턴에서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인 임영신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31년 이승만은 자신의 측근이며 임영신의 기전학교 은사인 이순길을 통해 임영신에게 청혼할 뜻을 밝혔으나 거절당하였다. 아내가 될 것인가 동지로 남을 것인가를 고민하던 임영신은 단독으로 이승만을 만나 거절하였다.

"아마 이 밤이 박사님을 뵈옵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는 그날까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생각입니다...(이하 생략)...저는 이미 독립운동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선생님 곁을 떠나서나, 선생님 곁에 있을 때나 언제든지 동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이승만은 실망하였으나 임영신을 측근으로서 신뢰하였고, 임영신은 그의 가깝고 충실한 측근이 되었으며 자신의 호를 이승만의 이름에서 따 승당(承堂)이라 짓기도 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은 홀로 귀국했다. 33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이 박사는 돈암장에 거주했다. 이때 윤치영의 부인 이은혜대한여자국민당의 당수였던 임영신 등이 돈암장을 자주 드나들며 그를 도왔다. 당시 이 박사는 71세, 임씨는 47세였는데, 두 사람이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이 소문은 이 박사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미국 캘리포니아대에 유학 중이던 임씨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확대 재생산됐다. 남편에게서 한국에 들어오라는 전갈이 있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프란체스카 도너에게 먼저 날아든 소식은 이 박사와 임씨의 관계에 대한 낯 뜨거운 소문이었다. 소식을 접한 그는 대로(大怒)했고 한국행을 서둘렀다. 귀국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남편과 임씨를 떼놓은 것이었다. 이승만이 돈암장에서 이주한 후 마포장에 머무를 무렵, 김구 외에 임영신윤치영만이 마포장을 통제받지 않고 출입하였다. 이때 이승만이 임영신과 동침한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프란체스카 도너임영신마포장에 출입금지 시켰다.

 

김구의 이승만 암살 미수 의혹

장덕수 사건 이후 사이가 틀어진 김구가 이승만의 암살을 시도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안두희 공판기에 의하면 김학규는 홍종만을 통해 안두희를 알게 되었다고 하며 김학규와 만나기 전부터 홍종만을 통하여 한독당에 입당할 것을 이야기하여 3, 4월경에 입당 절차를 밟았으며, 비서를 통하여 당원증을 내주게 했다고 하며 안두희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일은 없다고 한다. 김학규는 안두희와 만났을 적마다 대한민국에 대한 불평을 말하였으며, 때때로는 듣기에도 위험한 이야기까지 하고, 또 김구 자신의 증명서까지 얻어달라고 말하여 왔다며 김학규는 그 후로 홍종만을 통해 찾아주지 말기를 요구하며 김구의 암살 약 1달 전부터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고 말했다. 또한 김학규한국독립당에서 비밀당원증이란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진술과는 달리 김구가 경교장에서 암살되던 날 김학규경교장에 모인 한 측근에게 혈서를 하나 보여주었다.

사건 직후 경교장에서 보좌진을 부른 김학규는 자신이 소지하던 손수건 두 장 크기의 하얀 천을 한장 보였다. 천에는 "나는 미국제국주의의 주구 이승만을 타도한다"는 혈서가 쓰여 있었다. 보좌진들이 누가 쓴 것이냐 라고 붇자 김학규는 "안두희가 백범 선생 앞에서 쓴 것"이라며 믿었던 안두희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을 분해하며 부르르 떨었다.

이 사건 직후 김학규안두희의 혈서를 그대로 불에 태웠다. 그러나 김학규안두희김구에게 소개해서 이승만 암살을 도우려 했다는 정보는 이미 유출된 뒤였다.

 

친일 논란

1918년 징집서류에 이승만 본인의 국적을 'Japan'으로 자필서명한 사실이 미국 국가기록원과 고문서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닷컴 이 공개한 자료에 의해 드러났다.  더욱이 동시대 미주한인 대부분의 징집카드 국적란에 'Korea'로 표기되어 있던 것으로 드러나 그의 기회주의적 면모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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