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코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주다.
파리 코뮌(1871년 3월 18일 ~ 5월 28일) 또는 프랑스 제5차 혁명은 프랑스 파리에서 프랑스 민중들이 처음으로 세운 사회주의 자치 정부이다. 세계 처음으로 노동자 계급의 자치에 의한 민주주의 정부라고 평가되고 있는 파리 코뮌은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책들을 실행에 옮겼으며, 단기간에 불과하였지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같은 해 3월 3일부터 마르세이유, 리옹, 생테티엔, 툴루즈, 나르본, 그레노블, 리모주 등의 지방 도시에서도 같은 코뮌 결성이 선언되었지만 모두 단기간에 진압되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1870년과 1871년에 걸친 프로이센과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 제2제국 정부의 무능함에 대한 반발, 프랑스 민중들이 일으킨 항쟁이 파리 코뮌의 첫 시작이다. 파리 시민들의 농성에도 불구하고 1871년 1월 28일 휴전조약이 체결되면서 그 해 2월 12일 강화조약을 토의할 국민의회가 보르도에 설치되고 임시행정장관에 L.A. 티에르가 임명되었다.
국민의회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비준했으나 파리 시민은 오히려 항전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이 조약에 불만을 가졌다. 3월 1일 파리에 입성한 프로이센군은 파리 시민의 무언의 적의와 소극적 저항을 받으면서 3일 후에 철수하였다. 3월 3일 국민방위대의 중앙위원회가 구성되어 티에르 정부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의회는 구체제의 상징인 베르사유에 자리를 잡았고 파리 시민의 고통에 무관심하였다. 3월 18일 티에르의 임시정부는 정규군에게 농성 중인 국민군(의용병)이 사용한 대포 227문을 압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군인들은 명령에 불복종하는 하극상을 보였고 르콩트와 토마 장군이 사살당했다.
중앙위원회
이를 계기로 시민과의 마찰이 생겼으나 곧 정규군과 국민군 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어 19일 양자의 대표는 시청을 점거하고 ‘중앙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중앙위원회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코뮌(인민의회)의 선거가 실시될 것이며, 중앙위원회는 그 때까지의 잠정기관임을 분명히 하였다. 26일 실시된 선거의 투표율은 절반정도였으며 85명의 의원이 선출되었다. 1871년 3월 28일에 코뮌의 성립을 선포하였고 이후 5월 20일까지 파리를 자치적으로 통치하게 된다.
인민의 단결
파리코뮌에 참여한 인민들은 야간 이념 학습을 통해 단결하였기 때문에 70일간 자치 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파리 코뮌은 프랑스를 자유로운 코뮌들의 연맹체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인민들에 의한 지방정부인 코뮌을 수립하라는 호소문을 풍선에 매달아 날려 보냈다. 마르세유 등에서도 코뮌 운동이 일어날 정도로 그 영향력이 대단했으며, 10시간 노동, 노동자의 건강권을 침해하는 제빵노동자의 야간노동 철폐, 종교와 정치의 분리 등 사회 개혁을 주장하였다. 또한 파리 코뮌이 존재하는 동안 파리에서는 민중들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었다.
파리 코뮌은 다양한 이념을 가진 분파로 나뉘었는데 자코뱅파, 블랑키파, 무정부주의자, 제1인터내셔널파와 프루동파가 존재하였는데 대체적으로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눌 수 있다.
진압 과정
1871년 5월 21일 마크 마옹(Mac-Mahon)의 지휘 하에 정부군은 코뮌을 진압하기 위해 파리로 진입하였다. 프랑스 정부군을 지원한 나라는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네덜란드, 벨기에, 러시아 제국, 영국등이 있었다. 당시 파리 시민들은 튈르리 궁전 정원에서 코뮈나르(코뮌 지지자) 전사자 가족을 지원하기 위한 대규모 음악회에 참석했었다. 이 틈을 타 베르사유 정부군이 파리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왔다. 미리 심어놓은 간첩으로부터 생클루 문 인근에 수비대가 없다는 하얀 손수건 신호를 받은 베르사유군은 일차 선발부대를 보내 일대를 장악했다. 긴박한 소식이 코뮌 평의회에 알려지자 평의원들은 서둘러 산회한 뒤 방위태세를 갖추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코뮌 군사위원회 대표 샤를 들레클뤼즈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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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주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금술을 달고 군복의 솔기를 금빛으로 장식한 참모장교는 이젠 싫다. 민중에게 자리를 양보하라. 혁명을 알리는 종소리는 울려 퍼졌다. …<중략>… 시민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싸우고, 필요하다면 여러분과 함께 죽을 것이다. |
” |
밤이 되면서 시내에 들이닥친 정부군 본대 2만 명은 눈에 띄는 비무장 시민들에게 닥치는 대로 발포했다. 파리의 거리마다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파리코뮌의 마지막 "피의 일주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죽은 사람의 수는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는데, 적게는 1만 명 부터, 많게는 5만 명까지로 다양한 설이 있다. 진압 후 파리코뮌의 연루자 10만여 명이 체포되어 그 중 4만여 명이 군사재판에 기소되었다.
코뮌에 참여했던 7,500명의 인사들은 프랑스의 식민지인 누벨칼레도니로 종신 유배되기도 했다. 파리코뮌은 비록 실패했으나, 미국 보수언론들이 파리코뮌같은 공산주의 운동이 일어날 것이라며 노동 운동 탄압을 선동했을 정도로, 기득권층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이었다.
성과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은 파리코뮌 진압 이후에도 계속 생명을 유지한다. 사회주의 정당 운동은 1879년 창당된 프랑스 사회주의 노동자 연맹 ( 약칭 FTSF)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1936년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회(약칭 SFIO)와 프랑스 공산당, 급진당(Radical)의 "인민전선"이 원내 과반수를 차지하여 레옹 블룸이 총리로 선출되어 상당기간 여당으로 있었다. 이후 1981년에는 프랑스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후보가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출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는 코뮌이 일어난지 정확히 110년 뒤였다.
파리 코뮌기간동안 여성 참정권의 실현, 아동 야간 노동의 금지, 정교 분리등의 혁신적인 정책을 주장하였고, 달력도 프랑스 혁명력이 이용되었다. 덧붙여 선택된 의원안에는 사실파의 화가인 쿠르베도 일원이 되고 있다.
평가
훗날 소비에트 연방의 창시자 레닌은 파리 코뮌을 "세계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의 예행연습"이라고 높이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