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산장려운동, 경제적 예속화를 벗어나기위해 조선인 기업가와 지식인들이 규합하여 전개하다.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은 일제 강점기시절, 1920년대 일제의 경제적 수탈정책에 맞서 전개하였던 국민적 민족경제 자립실천운동이다. 이 운동은 평양과 경성을 중심으로 고당 조만식, 인촌 김성수 등이 주도하였다.
배경
1919년 3.1 운동으로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어 가게된다. 또한, 1910년대 총독부는 민족자본 회사를 억제하고자 회사 설립에 제한을 두었던 회사령을 철폐하였다. 총독부가 회사령을 폐지한 본질적인 이유는 일본 기업의 자본이 좀 더 한반도에 쉽게 진출할 수 있도록 내린 조치를 내리기 위해서였다. 그에 따라 1920년대 일제의 기업들이 식민지 조선에 지부를 설치하고 뿌리를 내리게 되고, 조선의 일본에 대한 경제적 예속은 더욱 심화되어 간다.
이러한 경제적 예속화가 심화되면서 조선인 기업가들이 단합해서 총독부에 건의도 수차례 하고, 탄원서를 몇 차례 올리는등 노력을 하였으나, 오히려 총독부에서는 일본제국과 식민지 조선 간의 관세를 철폐하는 조치를 내려 일본 기업에 굉장히 유리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 기업가들과 지식인들이 규합하여 경제적 예속화를 벗어나고자 물산 장려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전개
회사령 철폐로 인해 일본기업들이 식민지 조선에 진출하여 경제적 예속을 심화시킨 반면, 1920년대에 조선의 민족자본 회사 역시 점차 증가되면서 민족 기업을 지원하고, 민족 경제의 자립을 달성하기 위해 전개하게 된다.
1923년 1월 9일, 20여 개의 민족단체 대표 160여 명이 서울에 모여 발기준비대회를 열었고, 이어서 2월 16일에 3000여 명의 민족단체 회원들이 참가하여 발족시킨 모임이 물산장려운동의 중추적인 기구가 되었다. 물산장려운동의 구호는 '조선사람 조선으로!','우리 것으로만 살자!'였다. 주요 강령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의복은 남자는 무명베 두루마기를, 여자는 검정물감을 들인 무명치마를 입는다.
둘째, 우리손으로 만든 토산품은 우리 것을 이용하여 쓴다.
셋째, 일상용품은 우리 토산품을 상용하되, 부득이한 경우 외국산품을 사용하더라도 경제적 실용품을 써서 가급적 절약을 한다.
이 운동은 평양에서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 지도자들과 경성의 연희전문학교 학생 염태진등이 이광수의 지도 아래 자작회를 조직하고 이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렇게 비롯된 국산품 애용운동은 일본 기업들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예속화와 경제적 착취를 당해오던 조선인들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어, 소비조합을 비롯한 민족기업 등의 설립을 촉진시켰으며, 이 움직임이 인천을 거쳐 경성에서의 '조선물산장려회'의 창립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경성에서 조직된 '토산품애용부인회'와 경상남도 의령에서 시작된 '토산품장려 및 금연실천운동'등, 그 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금주단연운동, 토산품 애용운동은 상인들 모두 동참하고 협력하면서 거족적 애국운동으로 확대되어 갔다.
한계와 비판
그러나 물산 장려 운동은 운동 자체에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토산품만 사용하다 보니 토산품 가격이 크게 폭등하였고, 이는 곧 상인과 자본가들의 배만 채워주는 결과만 낳게 되어버린다. 이 때문에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가들과 지각있는 민중들이 '물산 장려 운동은 자본가 계급을 위한 것'이라고 맹렬히 비판한다. 여기에 일본 제국 총독부 당국의 극심한 탄압과 박영효, 유성준 같은 친일 세력들의 관여로 일제와 타협하게 되는 등 변질이 되어 감에 따라 결국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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