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응대군, 세종의 막내 아들, 신기전 개발에 큰 도움을 주다.
영응대군 이염(永膺大君 李琰, 1434년 5월 23일/음력 4월 15일 ~ 1467년 2월 2일)은 조선의 왕족이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여덟번째 아들이자 막내아들로, 문종, 세조, 안평대군 등의 친동생이다. 성은 이(李)씨, 이름은 염(琰),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명지(明之). 호는 서곡(西谷)이다. 시호는 경효(敬孝)이다.
생애
1441년(세종23) 영흥대군(永興大君)으로 봉해졌으며, 1443년(세종25)에 역양대군(歷陽大君)으로, 1447년(세종29)에 다시 영응대군(永膺大君)으로 개봉되었다. 대군은 원래 여산 송씨와 결혼하였으나 송씨는 병을 이유로 내쫓겼다. 세종의 명으로 송씨가 쫓겨난 뒤 영응대군은 참판 정충경의 딸 해주 정씨를 춘성부부인으로 맞이하였다. 후에 세종은 춘성부부인의 동생인 정종을 경혜공주와 혼인시키는데, 이는 영응대군이 단종의 후원세력이 되기를 바라면서 수양대군을 견제하려는 세종의 심모원려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이를 간파하고 본부인을 잊지 못하는 영응대군을 늘 송현수(대방부부인의 오빠)의 집에 데리고 다녔다. 이러한 잠행으로 영응대군은 궐 밖에 있는 송씨와의 사이에서 두 딸까지 두었고, 1453년(단종1) 단종은 결국 춘성부부인을 폐출시키고 송씨를 다시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척살하러 가면서 김종서를 유인하기 위해 썼던 이야기도 영응대군의 부인 문제였다. 영응대군이 죽고 난 뒤 송씨는 절을 짓고 승려를 가까이 했는데 그 중 학조와 사통했다는 이야기를 김일손이 사초에 적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고 음률(音律)에 밝았으며, 세종시대 때에는 고려 말의 최무선이 만든 화약 병기 주화(走火)를 발전시킨 신기전(神機箭) 개발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세조 9년에는 '명황계감(明皇誡鑑)'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세종은 여러 아들들 중에서도 영응대군을 특별히 사랑하여 총애하였고 1450년 그의 저택인 동별궁(東別宮)에서 승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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