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람, 단군을 민족의 기원으로 평가하다.
권람(權擥, 1416년 ~ 1465년 2월 6일)은 조선 초의 문신, 역사학자, 작가, 문인이다. 자(字)는 정경(正卿), 호는 소한당(所閑堂) 또는 소한당(所閒堂), 후주당(後週堂)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권근의 손자이다. 남이와 신수근이 그의 사위다.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다가 한명회와 교유했고, 그를 통해 신숙주 등을 소개받고 수양대군의 측근이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을 지냈으며, 그 이듬해에는 수양대군과 함께 《역대병요》를 편찬하였다. 1453년(단종 1년) 김종서를 몰아낼 때 앞장섰던 공으로 정난공신 1등관으로 녹훈되고, 승정원우부승지에 특진되었다. 1455년 세조 즉위 후,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 1등관으로 이조 참판 길창군이 되었고, 1458년(세조 4년)에는 수찬관으로 신숙주 등과 함께 《국조보감》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그는 활을 잘 쏘았을 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뛰어났으나, 횡포가 심하고 많은 축재를 하여 여러 번 탄핵을 받았다. 우찬성과 좌찬성,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길창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5촌 당조카딸 권영금이 백촌 김문기의 며느리로서 사육신 사건 이후 노비가 되었으나 자신이 권영금을 분배받는 형태로 하여 노비 신세를 면하게 하였다. 그러나 다른 친척인 단종의 후궁 소의 권씨의 재산을 차지하여 비난을 받기도 했다. 태종의 외손자 남이(南怡) 장군과, 훗날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 되는 신수근이 모두 그의 사위였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한상환, 류태재의 문인이다.
역사관
권람은 단군을 민족의 기원으로 평가했다. 시문집으로 《소한당집》이 있는데, 할아버지 양촌 권근이 지은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응제시주 應製詩註》는 단군 신화를 다루는 서적이기도 하다. 그의 역사의식을 반영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조 때 《동국통감》의 편찬방향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그는 단군을 민족 시조, 개국 시조라고 불렀다. 《응제시주 應製詩註》에서 그는 주요 장마다 민족시조(民族始祖), 개국시조(開國始祖) 라는 단어를 거의 빠짐없이 수록하였으며, 삼국유사나 민간 전승 등으로 전해오는 설화 중심의 서술을 하고 있다. 이는 이는 기자와 기자조선을 시초로 생각하는 사림파나 성리학자들의 국사관과는 다른 점이기도 하다.
무속 신앙
권람은 무속을 신봉하기도 했다. 국교가 유교인 조선에서 무속에 대한 신봉은 용납될수 없는 사상이었으나 그가 세조의 반정공신인 탓에 불이익을 받지 않을수 있었다. 한번은 사위로 남이를 사위로 낙점할 때 무속인에게 점을 쳐 보았으나 역적이 될 조짐이라는 괘가 나오자 파혼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사후라는 말을 듣고 다시 번복했다 한다.
1464년 신병으로 경기도 파주군의 감악산에 올라 감악산신(紺岳山神) 설인귀(薛仁貴)에 치성을 드릴 때, 비바람이 몰아치자 “당신(설인귀)과 나는 세력이 서로 같은데 어찌하여 이와같이 몰아치는가.” 하고 호통하였다.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명신(名神)을 숭배하여 사람들의 의아심을 사기도 하였다. 이는 안향, 백이정의 학맥을 계승했으며 이색의 문하생인 성리학자였던 할아버지 권근과 비교 대조되었다.
평가
당대의 권람은 성격이 활달한 대인으로 평가되었다. 성품은 도량이 넓고 너그럽고 크며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사소한 것을 마음에 담아두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조용하며 말수가 적었고 생각이 깊었다. 왕조실록에는 '젊어서는 뜻을 두텁게 하여 힘써 배우더니, 큰 뜻이 있어 작은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 고세(高世)한 선비로 여겨, 나이 30세가 넘도록 관직을 얻지 못하자, 주변에서 그에게 굽힐 것이라고 하였으나 굽히지 않고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비판
그러나 사림파가 집권한 이후 아버지를 배신하고 가출한 불효자로 몰려 비판과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유학자의 후손이나 무속을 신봉한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사위가 신수근인 점도 인신공격의 대상이 되었으나 단경왕후에 대한 동정여론이 곧 조성되면서 묻혀지게 된다.
사림의 집권 이후 조성된 도학적 분위기로 훈구파 공신들에 대한 비판여론이 조성되어 거의 정설처럼 굳어졌으나, 한명회나 신숙주에 비교하여 그에 대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었다.
기타
사위감을 점지할 때 사위감인 남이를 데리고 점을 보러 갔다. 이때 무속인이 사위가 역적이 될 상이라 하였으나 그는 연좌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의 딸과 그가 죽은 뒤 남이는 남이의 옥사로 그의 동지이자 친구인 한명회, 신숙주 및 당시의 신진관료 유자광 등에 의해 처형된다.
일찍이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명산고적을 떠돌아다니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가 첩에 혹하여 정처를 소박한 데 대한 불만이었고 그를 방황하게 만들었다. 아버지 권제가 본부인인 어머니를 내쫓고 첩을 총애한 것에 반감을 갖게 된 그는 한때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첩을 거느리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한명회와 가까워지면서 권력을 꿈꾸게 되었으며 마침내 수양과 함께 정난을 일으켜 그의 좌장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게 된 것이다.
그의 외손녀는 단경왕후 신씨로 중종 반정을 퇴출되는 중종의 첫 부인이었다.
사치
만년에 병(病) 때문에 관직을 사퇴하고 집에 나갔는데, 권람이 재물을 축재하는 일에 부지런하여, 일찍이 남산(南山) 아래에 집을 지었는데 제도(制度)가 지나치게 사치하고, 또 호사스러운 종(豪奴)이 방종하게 행동하여 사족(士族)의 신분을 능가하게 행동하니 이를 본 참찬(參贊) 이승손(李承孫)이 권람의 종을 꾸짖었다. 그러나 이승손 등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권람이 이를 죄주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권남의 사치와 그 종의 월권행위를 못마땅히 여겼다.
아호
권람의 사위 신수근의 아호도 소한당(所閒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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