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의 성격,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2)
긍정적 평가
숙종은 크고 작은 당파 싸움으로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세력이 강한 붕당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집권 정당을 수시로 교체시키는 환국을 실행하였고, 그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숙종의 왕권 강화 정책은 정치 세력을 철저히 이용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기에 그가 죽은 후 절대 왕권은 숙종의 치세에서만 끝나게 된다. 조선왕조 중 가장 당쟁이 격심했던 시기로 대외적인 전쟁이 없어 태평안일했으며, 그의 애증의 감정 노출이 심한 것을 당인들이 교묘히 조종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부정적 평가
이덕일은 그가 윤증이 제시한 세가지 타협안을 거절한 것을 두고 패도정치 라며 비판하였다. 이덕일에 의하면 윤증이 '서인과 남인의 원한을 풀 수가 없고, 삼척 (三戚: 김만기·김우명(김석주)·민유중의 세 외척 가문) 의 문호를 막을 수 없고, 지금의 세태는 자신의 뜻과 다른 자는 배척하고 순종하는 자만 같이합니다. 이런 풍조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될 터인데, 공이 할 수 있겠소? (『당의통략』)'라고 제시한 것을 숙종이 받아들여야 했다며 비판했다.
세 가지 조건은 정치공작 기획자 처벌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서인과 남인 사이의 원한도 풀리고 외척 (김석주) 의 세력도 퇴조하면서 공존의 정치가 회복될 수 있었다. 숙종이 이 길을 걸었으면 분열의 정치는 통합의 정치로 전환되고, 증오는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었지만 그는 정치권을 분열시켜 왕권을 강화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패도 정객에 불과했다. 왕권은 강화되었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사대부들의 착취에 시달렸다. 왕권 강화와 백성들이 따로 노는 괴리현상이 심해졌던 것이다.
성격
그는 세자 시절 낙죽(우유)을 마시다가 송아지가 우는 소리를 듣고 불쌍한 마음에 먹는 것을 그만두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본래 부드러운 성격이었으나 한번 화가 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신경질을 내었으며, 때로는 극단적인 행동도 곧잘 취했다고 한다. 이러한 울화병은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까지 이어졌다.
윤휴 사사 공작
허견의 옥사 당시 허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윤휴가 엮어져서 사형당한 것에 대해 숙종의 계략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에 의하면 남부 중국 전역을 전쟁터로 몰고 갔던 삼번의 난이 거의 진압되고 있었다. 숙종 4년 8월 오삼계가 죽고 손자 오세번이 뒤를 이었고, 청군은 숙종 5년 악주를 탈환했다. 삼번의 패퇴가 기정사실이 되자 숙종은 북벌을 위한 도체찰사부를 역모의 근거지로 만들고 북벌론자 윤휴 등을 사사함으로써 청의 의심에서 벗어나려는 술책을 부린 것이다. 서인은 북벌을 위한 허적의 도체찰사부 복설에 찬성하였으면서도 허적이 역모를 꾸민다며 날조했고, 숙종은 이를 근거로 허적의 도체찰사부 부활의 근거가 된 윤휴의 북벌론을 문제삼아 그를 처형했다는 것이다.
조세 정책의 실패
숙종은 부자들이 재산을 털어 가난 구휼에 나서는 권분을 강조했으나 국왕이 희생하지 않는데 부자들이 적극 나설 리 만무했다. 숙종은 공명첩의 발행 양을 늘리는 한편, 문무 제신들과 지역의 토호들에게 곡식을 풀라고 강제로 명을 내렸으나, 제신들과 지역의 토호들은 그의 명을 따르기를 거절한다.
굶주린 백성들은 집단행동에 나섰다. 1697년(숙종 23년) 4월 경기도 광주 백성 수백 명이 서울로 몰려와 출퇴근하는 대신들을 붙잡고 곡식을 달라고 호소하고 광주 수어사(守禦使) 이세화(李世華)의 집에 쳐들어가 욕하면서 군관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숙종은 강경책을 발동, 관련자들을 잡아서 처형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한편 숙종은 청나라 조정에 청하여 조선과의 교역량을 늘리고 식량의 지원을 요청한다. 국내에 곡식이 없으면 임진왜란 때 유성룡이 압록강 중강진에 국제 무역시장인 중강개시를 열어 명(明)의 곡물을 들여온 것처럼 청의 곡식을 들여와 기민을 구제해야 했다. 1697년(숙종 23년) 5월 12일 대사간 박태순이 개시를 열어 청나라의 곡식을 수입할 것을 주장했으나 4개월 후인 9월 21일에야 이 문제가 조정에서 논의되었다. 찬반 양론이 갈려 갑론을박하다가 본격적인 교역은 나라가 ‘소식(蘇息:숨통이 트임)되기를 기다려 하자’고 유보하면서도 일단 재자관(사신의 일종)을 파견해 곡식만 먼저 교역하자고 청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서 1698년(숙종 24년) 1월 청나라에서 좁쌀 4만 석이 들어와 서울·경기·충청·서로(평안도·황해도)에 1만 석씩을 나누어주어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그러나 흉년과 흉작은 계속되었고, 동시에 양반들과 토호들의 수탈과 횡포도 심해져 민란과 도주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숙종은 호적제도를 강화하여 인구이동을 통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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