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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도쿠가와 막부, 사농공상의 신분을 고정하며 전국 지배를 강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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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도쿠가와 막부, 사농공상의 신분을 고정하며 전국 지배를 강화하다.

 

에도 막부(일본어: 江戶幕府) 또는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는 일본사에서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에 이어 일본사에서 세 번째로 나타난 최후의 막부이다. 1603년 3월 24일(게이초 8년 음력 2월 12일)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쇼군(征夷大将軍 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고 막부를 창설하였을 때부터 시작되어, 1867년 11월 9일 (게이오 3년 음력 10월 14일)에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대정봉환이라는 이름으로 정권을 천황에게 넘기게 된 것으로 막을 내렸다.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들이 일본을 지배한 이 264년간의 시기를 에도 시대 또는 도쿠가와 시대라 한다. 에도 막부는 바쿠한(幕藩) 체제 밑에 사농공상의 신분을 고정하고, 기독교 금지를 구실로 쇄국을 하고, 후에는 유교적 교화도 이용하면서 전국 지배를 강화했다. 조선에 대해서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통신사를 12회 초청하여 두 세기 동안 양국간의 밀접한 교류를 하였다. 에도 시대 말기, 막부 타도 운동이 융성하였던 격동의 시기는 막말(幕末 바쿠마쓰)이라 칭한다.

 

설립 과정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정벌에 실패하고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쇼군이 되겠다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나타냈고, 이에 이시다 미쓰나리는 도쿠가와 토벌군(서군)을 창설하게 된다. 서군은 명분상 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삼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동군을 창설한다. 1600년 서군과 동군 총 10만의 병력이 세키가하라에서 결전을 펼치게 되는데(세키가하라 전투), 이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서군을 배반하고 동군에 항복함으로써 서군은 대패하고 이시다 미쓰나리는 잡혀 처형당하게 된다. 1603년 3월 24일 일본의 패권을 완전히 잡은 도쿠가와는 에도 막부를 건립하게 된다.

 

오사카 점령

에도 막부는 설립하였지만 도쿠가와에게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라는 걸림돌이 남아있었다. 이에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있는 오사카를 공격하였지만(오사카 겨울 전투) 크게 패배하게 된다. 이에 후퇴하겠다는 거짓 타협을 하고,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긴장이 풀리자 도쿠가와는 그대로 오사카로 진격하여 점령하고, 히데요리는 할복하게 된다. (오사카 여름 전투)

 

관직(官職)

 

 

경제

에도 막부 시기에 태평 무드의 지속은 교통·상공업의 발전과 시정인(市井人)의 대두, 화폐 경제의 성립, 다수의 도시 출현 등 상품경제가 크게 발달하였는데 이러한 경제 발전의 혜택은 기존의 사무라이 계층보다는 상인 계층, 즉 조닌들이 차지하였다. 경제의 실권을 쥔 도시민의 힘은 한편으론 무사의 권위를 실추시켰다. 이에 따라 무사에 돈을 주고 무사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에도막부에서는 교역선에 슈인장을 부여하여 조닌들은 동남아에 진출하여 일본인들의 마을을 만들었다.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대(1680~1709년)에 에도 막부는 겐로쿠(1688~1703년) 호황이라고 부르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심각한 낭비와 더불어 1657년 발생한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 겐로쿠 호황으로 쌓인 탄탄한 재정은 점차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금·은화의 가치를 떨어뜨려 새로 화폐를 주조하여 그 차익으로 재정을 충당하였지만 이로 인한 화폐 가치의 저하와 함께 급등한 물가로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노부(재위:1709~12년)는 겐로쿠 화폐 대신 양질의 새로운 화폐인 쇼토쿠 화폐를 주조하고 금은의 유출을 막기 위해 쇼토쿠 신령을 발표, 나가사키 등의 무역항에 들어올 수 있는 외국 선박 수와 무역액을 크게 제한·삭감하는 등 겐로쿠 호황 직후에 일어난 경제적 동요를 막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겐로쿠와 쇼토쿠(1711~15년) 시대의 짧은 호황을 지나면서 견고했던 막부 체제는 점차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농민의 궁핍화와 거듭되는 재해는 농민폭동을 빈발하게 하여 바쿠한 체제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농촌에서도 토지매매 금지령이 유명무실해져 자작농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노부 대(1709~12년)에 겐로쿠 화폐를 대신할 화폐가 주조된 이후 몇대에 걸쳐 계속 화폐의 질과 주조량을 변화시켜가면서 재정을 보충하고자 했고 직할령의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재정난 속에서 기이 도쿠가와 씨 출신으로 제8대 쇼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무네(1716~45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로의 복귀를 표방하면서 절검, 상무를 강조하면서 상품경제와 조닌을 억제하는 개혁(교호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그 효과는 크지 않았고 농민봉기 즉 잇키가 빈발하였다. 18세기 후반 들어 다시 관정개혁을 실시하지만 이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18세기 후반 이후에 막부 정권은 점차 동요하게 된다. 먼저 막부정권과 각 지역 한[藩]은 재정난에 시달렸고, 이에 경제난을 모면하고자 조닌과 농민의 이익을 권력층이 차지하는 전매제를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는데, 이는 민중들로부터 커다란 반발을 샀다. 제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 대에는 다누마 오키쓰구다누마 씨를 중심으로 하여 재정 회복을 꾀하였지만 결국 당대에 일어난 기근과 같은 자연 재해로 인하여 실패, 결국 실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고산케 계층 등은 이에 대한 책임을 다누마 씨에게 물어 실각시켰다.

 

사회

에도 막부 정권 시기에는 그 이전의 사무라이 집권시대와 많은 차이를 보였다. 에도에 설치된 막부는 전국의 다이묘(봉건 영주)들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정책을 하였고, 전국 각지의 군사적 요충지와 상업지역, 무역항구 등을 직할지로 삼아 전 열도를 중앙에서 어느정도 통제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에도 막부 정권을 '중앙집권적 봉건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쿠가와 히데타다가 20년에 걸쳐 안정시킨 막부를 이어받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중신들에게 유교 사상을 철저히 연구할 것을 지시했고, 한편으로 도쿠가와 미쓰쿠니 등은 《대일본사》(大日本史)와 같은 역사서를 편찬하는 등 문치(文治)를 지향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5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 대에 에도 막부는 겐로쿠 호황이라고 부르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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