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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로

윤원로, 문정왕후의 동생, 윤임과 다투다가 파직· 유배되다. 윤원로, 문정왕후의 동생, 윤임과 다투다가 파직· 유배되다. 윤원로(尹元老, ? ~ 1547년)는 조선시대 중기의 무신이자 척신으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아들이자 윤원형의 형, 윤원량과 윤원필, 문정왕후의 동생이다. 대윤의 영수 윤임은 그의 아버지 윤지임과 8촌형제 간이 된다. 김안로와도 사돈간이 되는데, 김안로의 아들 김희와 중종과 장경왕후의 딸 효혜공주의 장녀 김선옥은 그의 아들 윤백원과 결혼했다. 또한 그의 형 윤원량의 딸 숙빈 윤씨는 인종의 후궁이었다. 김안로의 사돈이면서 중종과는 처남매부간이자 인종의 처숙부이고 명종의 외숙부이자 중종의 딸 효혜공주의 사돈으로, 중종과는 이중 삼중 인척관계에 있었다. 생애 1515년 장경왕후가 원자(훗날의 인종)를 낳고 산후병으로 죽자 15.. 더보기
윤원형, 사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1907년 이완용의 건의로 사면 복권되다. 윤원형, 사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1907년 이완용의 건의로 사면 복권되다. 윤원형(尹元衡, 1509년 ∼ 1565년 11월 18일)은 조선 중기의 외척이자 문신으로, 파산부원군 윤지임과 전성부대부인 전의 이씨(全城府夫人 全義李氏)의 넷째 아들이자 문정왕후의 남동생이며, 윤원량 · 윤원로의 동생이며 소윤(小尹)의 영수이다. 명종의 외숙으로 윤임, 김안로, 이량, 심통원 등과 함께 인척세력의 대표적 인물이며 을사사화를 날조했다. 정난정은 그의 첩이었다. 본관은 파평(波平). 자는 언평(彦平)이다. 1533년(중종 28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외조카인 경원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노력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친족인 윤임, 처당숙 김안로(金安老) 등과 갈등했다. 김안로의 공격으로 유배되었.. 더보기
정난정, 윤원형의 애첩, 악녀의 대명사 정난정, 윤원형의 애첩, 악녀의 대명사 정난정(鄭蘭貞, ? ~ 1565년 11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외척이며 명종의 넷째 외삼촌이자 재상인 윤원형의 애첩이자 그의 둘째 부인이다. 명종조의 권력자 중 한 명으로, 윤원형의 본부인 연안 김씨를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았으며, 사후 사림파는 그녀를 악녀의 대명사로 일컬었다. 본관은 초계(草溪)로 아버지는 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이고, 정난정은 그와 그의 첩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였다. 한성부 출신. 출생과 가계 한성부에서 초계 정씨 오위도총부 부총관 정윤겸과 차실(次室) 남씨(南氏)의 2남 3녀 중에서 막내 딸로 태어났다. 모친은 본래는 상민이 아니었으나 난신에 연좌된 부녀로서 노비가 되었고, 정윤겸의 집에 분배되었다. 그는 정윤겸과 노비가 된 반가 여성 사.. 더보기
효혜공주, 중종의 장녀, 산후병으로 향년 21세로 사망하다. 효혜공주, 중종의 장녀, 산후병으로 향년 21세로 사망하다. 효혜공주(孝惠公主, 1511년 6월 13일(음력 5월 18일) ~ 1531년 5월 6일(음력 4월 20일))는 조선 중기의 공주이다. 제11대 왕 중종의 장녀로,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 소생이다. 제12대 왕 인종의 친누나이자 김안로의 며느리이다. 본관은 전주, 이름은 옥하(玉荷)이다. 생전 부친인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지며, 김안로가 복관하는 데에 구실을 만들어준 존재이다. 생애 1511년(중종 6) 6월 13일(음력 5월 18일) 탄생하였다. 1515년(중종 10) 3월 16일(음력 3월 2일) 5세 때 모후인 장경왕후를 여의었다. 어머니를 잃은 후 성종의 후궁인 남씨와 이모 윤씨에 의해 양육되었다. 1520년(중종.. 더보기
중종, 왕권을 신권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만 하다. 중종, 왕권을 신권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만 하다. 중종(中宗, 1488년 4월 16일 (음력 3월 5일) ~ 1544년 11월 29일 (음력 11월 15일), 재위: 1506년~1544년)은 조선의 제11대 왕이다. 휘는 역(懌),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 자는 낙천(樂天)이며, 사후 시호는 중종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이다. 묘호는 중종(中宗)으로 결정되었는데 연산군으로부터 나라를 구하여 중흥시켰다는 의미로 정해진 것이다. 반대로 38년의 재위기간 중에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그저 가운데 중(中)자를 썼다는 해석도 있다. 인종은 '종'(宗) 자로는 부족하다 하여 중조(中祖)를 제안했는데, 중종을 연산군 대신 잇는 왕으로써 '조'(祖)를 붙이는 것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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