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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성

문수산성,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과 치열한 격전을 치루다. 문수산성,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과 치열한 격전을 치루다. 강화도의 갑곶진(甲串鎭)을 마주보고 있는 해발 376m의 문수산 험준한 정상부에서 서쪽의 산줄기를 따라 내려가, 문수골과 산성포의 두 계곡을 포용하여 해안지대를 연결한 포곡식의 산성이다. 현재 해안쪽의 성벽과 문루는 없어지고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곽은 본래의 것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갑곶진과 더불어 강화 입구를 지키기 위하여, 1694년(숙종20)에 축성되었는데 이후 1812년 (순조12)에 대대적으로 중수되었다. 당시 성문은 취예루·공해루 등 세 개의 문루와 세 개의 암문이 있었다. 이 가운데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강화에서 육지로 나오는 관문 구실을 하였다. 특히, 이 성은 1866년(고종3)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 더보기
병인양요,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 전쟁 병인양요,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 전쟁 병인양요(丙寅洋擾 )는 1866년(고종 3년)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병인박해)을 구실로 삼아 외교적 보호(diplomatic protection)를 명분으로 하여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적인 전쟁이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훈련대장 밑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해 무력으로 대항했다. 조선군이 완강히 저항하자 프랑스 해군은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진짜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침범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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