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수, 두 차례에 걸친 연행을 통하여 세계 정세를 파악하고 개항을 역설하다.
박규수, 두 차례에 걸친 연행을 통하여 세계 정세를 파악하고 개항을 역설하다. 박규수(朴珪壽, 1807년 10월 27일 ~ 1877년 2월 9일)는 조선 시대 말기의 문신으로 군인, 외교관, 개화사상가, 철학자이며 화가, 지도 제작자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가 깊었고, 제네럴 셔먼 호를 격퇴하고 경복궁 재건의 총책임을 맡는 등 흥선대원군으로부터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연암 박지원의 학문 및 사상의 계승자로서 척화론(斥和論)에 반대하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후 양무 운동처럼 서양 기술의 선택적 도입과 국제 통상을 주장했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박정양, 윤치호 등 개화파 청년들을 길러냈으며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될 때는 위정척사파의 명분론을 반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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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열하일기를 저술하여 실학사상을 주장하다.
박지원, 열하일기를 저술하여 실학사상을 주장하다. 박지원(朴趾源, 1737년 3월 5일(음력 2월 5일) ~ 1805년 12월 10일(음력 10월 20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이자 사상가, 외교관, 소설가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65년 처음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했으며, 이후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다.과거에 여러번 낙방한 후 학문 연구와 청나라의 신문물에 관심을 두었다. 정조 즉위 후 여러번 학문과 문장력으로 추천받았지만 고사하다가 집안의 거듭된 권고로 1786년 문음으로 출사하게 된다. 1786년 음서로 선공감 감역이 되어 1789년 평시서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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