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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림대군

영릉 효종의 능 사회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하여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다. 영릉 효종의 능 사회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하여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다. 능호 : 영릉 위치 :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 지정번호 : 사적 제195호 조성시기 : 1673년(현종 14) 능의 구성 영릉은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과 비 인선왕후의 쌍릉이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언덕에 같이 있는 경우 대개는 봉분을 나란히 두는 쌍릉의 형식을 택하는데, 영릉은 특이하게도 왕릉과 왕비릉이 상하로 조영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놓을 경우 생기가 왕성한 정혈을 비켜가야 하기 때문에 좌우 쌍릉을 쓰지 않고 상하혈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를 동원상하릉이라고 하는데 동원상하릉 중에서는 영릉이 조선 최초이다. 왕.. 더보기
김자점, 산림 학자 세력으로 비정상적인 권력남용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다. 김자점, 산림 학자 세력으로 비정상적인 권력남용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다. 김자점(金自點, 1588년 ~ 1651년 12월 17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정치가, 군인, 성리학자이며 인조의 서녀 효명옹주의 시조부로 왕실의 인척이었다. 자(字)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본관은 경북 안동이다. 이력 그는 인조 반정에 참여하였고 귀인 조씨의 인척이었으며 친청파 정치인이었다. 음서제로 관직에 올라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이르렀으며 낙흥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인조 반정의 모의에 가담하였으며 1623년 3월 반정을 꾀해 군대를 모아 홍제원에서 이괄 등의 군사와 합류하였고 반정에 성공한 공로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특별 승진하고, 도원수가 되었으며,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관에 녹훈되고 낙흥군(洛.. 더보기
효종, 봉림대군, 북벌정책은 한창 떠오르는 세력이었던 산림 세력과 손을 잡기 위해 택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효종, 봉림대군, 북벌정책은 한창 떠오르는 세력이었던 산림 세력과 손을 잡기 위해 택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효종(孝宗, 1619년 7월 3일 (음력 5월 22일) ~ 1659년 6월 23일 (음력 5월 4일), 재위: 1649년 ~ 1659년)은 조선의 제17대 임금이다. 인조와 인렬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623년 인조 반정 후 왕자로 책봉되고 1626년 봉림대군의 작위를 받았다. 1635년 대군사부로 임명된 송시열, 윤선도, 송준길 등에게서 성리학을 수학하였으며, 1637년 정축하성 이후 소현세자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8년만에 귀국했다. 그 뒤 형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으면서 부왕 인조에 의해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7년부터는 부왕 인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시행하였고 1649.. 더보기
병자호란, 동아시아 역사에서 명청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다.(1) 병자호란, 동아시아 역사에서 명청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병자년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조과 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청의 홍타이지가 명을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왕실이 피난한 강화도의 함락, 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근왕병의 작전 실패 등으로 말미암아 항복하였다.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청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며,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십 만의 백성이 청으로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다. 개요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었으나, 강화조약에 따라 명과의 관계에는..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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