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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혜청

민영익, 김옥균·서광범 등을 암살하기 위하여 자객을 밀파하다. 민영익, 김옥균·서광범 등을 암살하기 위하여 자객을 밀파하다. 민영익(閔泳翊, 1860년~1914년 중국 상하이)은 조선의 정치인이다. 처음에는 온건 개화파 정치인이었다가 갑신정변 전후로는 조선 말기 민씨 외척 정권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명성황후의 친정 일족이었다. 자(字)는 우홍(遇鴻), 호는 운미(雲楣) 또는 죽미(竹楣)·원정(園丁)·천심죽재(千尋竹齋)이며, 본관은 여흥이다. 경기도 출신 출생과 가계 민영익은 1860년 민태호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7대조 민유중의 딸이 숙종 계비로 책봉되면서 중앙 정계의 핵심 세력으로 떠올랐지만, 고조부가 예조판서를 지낸 이후로는 권력에서 점차 소외되었다. 민영익이 태어났을 때, 민태호는 동생 집에 얹혀살면서 콩죽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처지였다. 흥선대원군.. 더보기
균역법, 군역세법 개혁, 양반층은 징수 대상에서 벗어나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 균역법, 군역세법 개혁, 양반층은 징수 대상에서 벗어나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 균역법 (均役法) 은 조선 후기 군역을 대신하는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인 군역세법 개혁이다. 호당 군포를 부과한 것이 아니라, 토지 1결당 군포를 부과하여 지주들의 납세를 촉진시키려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5군영의 성립으로 대부분의 양인 장정은 1년에 2필씩 군포를 부담하는 납포군이 되었다. 하지만 군포 징수에 따른 폐단으로 가난한 농민층에 대부분의 부담이 전가되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17세기 중엽 인조, 효종 때부터 양역변통론이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발전하여 균역법이 시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균역법이 시행된 것은 영조 대의 일이다. 1750년(영조 26년)에 와서 이 제도의 시행을 담당하는 관청인 균역절목.. 더보기
임오군란,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으로 훈련도감 구식 군인들이 항쟁하다. 임오군란,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으로 훈련도감 구식 군인들이 항쟁하다. 임오군란(壬午軍亂)1882년(고종 19년; 임오년) 음력 6월에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옛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병란 및 항쟁이다. 1873년 이래 대궐에서 사용되는 비용은 끝이 없었다. 호조나 혜청에 저축해 온 것 모두가 바닥나 경관의 월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으며 5영 군사들도 자주 급식을 받지 못했다. 개화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5영을 파하고 2영으로 개편했는데 이때 쫓겨난 노약자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무력으로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10년간 월급이 체불되었고 나중에는 군대에서 쫓겨나..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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