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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고종 독살설, 전국적인 규모의 3·1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다. 고종 독살설, 전국적인 규모의 3·1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다. 고종 독살설(高宗毒殺說)은 대한제국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사망한 원인이 일제의 사주로 인한 독살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참석과 함께 후일 2·8 독립 선언과 3·1 만세 운동에 영향을 준 하나의 동인이 되었다. 고종은 1월 21일 아침 6시에 덕수궁에서 사망했는데,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설이 있는 반면, 그날 아침 한약,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는 것이다. 고종의 시신을 염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시신이 사후 1~2일 밖에 안되었을때도 심하게 부풀어져 있었고 이가 이미 다 빠져있는 등 부패가 .. 더보기
이완용의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이완용의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긍정적 평가 일단, 그는 조선의 문을 닫은 장본인이고 일본을 끌어들인 것은 맞으나, 그가 있었기 때문에 왕통(王統)의 단절만은 면했다. 그가 일본과 교섭한 결과, 일제시대에도 이왕직(李王職), 왕세자부(王世子附) 등을 통해서 왕실의 명맥만은 유지가 되었으며, 왕족 대부분이 조선인 귀족으로서 일제시대에도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데는 평가가 일치한다. 과거 대한 제국의 지배층들 역시 일본에 귀순한다는 조건으로 귀족 작위를 받게 했고, 멸문을 당하게 하지는 않았다. 즉, 조선은 망했어도 왕실만은 남긴 것이다. 이는 그의 일본에 대한 기민한 외교적 대응이 효과가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내 온건파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은 얻어냈다. 그래서 왕이 보는.. 더보기
단발령, 일본인, 서양인들의 진언에 따라 고종은 최초로 단발을 감행하다. 단발령, 일본인, 서양인들의 진언에 따라 고종은 최초로 단발을 감행하다. 단발령(斷髮令)은 김홍집 내각이 고종 32년인 1895년 음력 11월 15일(양력 12월 30일)에 공포한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를 하라는 내용의 고종의 칙령이다. 서양인, 일본인들의 단발 건의 이후 당시 내무부대신 유길준 등의 상주로 전격 단행되었다. 당일부로 고종과 황태자 순종은 솔선수범하여 머리를 깎고, 내무부대신 유길준은 고시를 내려, 관리들로 하여금 칼과 가위를 가지고 도성 거리나 성문에서 백성들의 머리를 깎게 하여 이를 직접 지도감독했으며,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그러나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당대의 성리학자들의 격렬한 반발로 1897년(건양 1년) 일단 철회되었으나, 1900년(광무 3년) 이후 광무개혁을.. 더보기
만민공동회, 박성춘, 시민들의 주장과 힘을 보여준 대중운동 만민공동회, 박성춘, 시민들의 주장과 힘을 보여준 대중운동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또는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는 조선말, 대한제국의 대토론회, 시민운동이자 시민사회단체로 독립협회에서 처음 주관하였다가 1898년 4월을 기점으로 독립협회의 영향력에서 독자적인 민중대회, 단체로 성장했다. 1897년(광무 1년) 초 독립협회의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 주최하에 민중대회로 처음 개최되었으며, 한성부의 시민, 소상인, 일부 지식인층이 참여했다. 이후 1897년 10월 박정양을 비롯한 정부의 개혁적 관료들과 독립협회가 함께 주관하면서 범국민적인 대회, 단체로 성장했다. 정부 측의 박정양, 이상재, 독립협회 측의 서재필, 윤치호 등이 이를 지도하였다. 만민공동회는 처.. 더보기
이회영,교육진흥운동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만주로 망명하다.(2) 이회영,교육진흥운동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만주로 망명하다.(2) 독립운동 준비 계획 1905년 을사 늑약 체결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이 차츰 가시화되자 이회영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하기로 결정하여 1906년 10월, 만주에 서전서숙을 세우고 무력항쟁 기지를 설립할 구상을 하여 전 재산을 처분하였다. 한편 그는 서전서숙의 교장으로 이상설을 초빙하여 동지획득과 교포교육에 주력하게 했다.1907년 그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을사조약 체결의 억지, 강압성을 폭로하려는 계획을 세워 고종에게 건의하였다. 고종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헤이그로 밀사를 보내지만 일본의 조선통감부 경찰에 적발되면서 이는 고종의 퇴위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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