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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

숙종, 전란 피해 복구로 중흥의 기틀이 다져지다.(1) 숙종, 전란 피해 복구로 중흥의 기틀이 다져지다.(1) 숙종(肅宗, 1661년 10월 7일(음력 8월 15일) ~ 1720년 7월 12일(음력 6월 8일))은 조선의 제19대 왕이다. 성은 이(李), 휘는 돈(焞),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명보(明譜),현종과 명성왕후의 외아들로 비는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 계비는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제2계비는 김주신의 딸 인원왕후이다. 1674년부터 172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674년부터 1717년까지 친정하였고 1717년부터 1720년 승하할 때까지 아들 경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재위기간 중 강해진 신권을 줄이기 위해 환국정치를 통해, 서인과 남인간의 세력을 조절하고 왕권을 강화시켰다. 숙종은 역대 조선의 국왕들 중, 가장 왕권이 강했던 왕.. 더보기
갑술환국, 왕권 강화를 위해 특정한 원인이 없이 두 여인의 당파를 번갈아 기용한 것으로 해석되다. 갑술환국, 왕권 강화를 위해 특정한 원인이 없이 두 여인의 당파를 번갈아 기용한 것으로 해석되다. 갑술환국(甲戌換局)은 1694년(숙종 20년) 4월 1일에 발생한 숙종 시대의 3차 환국으로, 기사환국이 발생한 1689년 2월 2일 이후로 정권을 집권해온 남인이 몰락하고, 기사환국 때 몰락했던 서인(노론·소론)이 재집권한 사건이다. 과정 숙종 20년(1694년) 3월 23일, 민암(閔黯)이 한성 내 노·소론가의 자제들이 재물을 모아 환관(宦官)·폐인(嬖人)과 척가(戚家)에게 뇌물을 써서 거짓말과 허위의 풍문(風聞)을 만들어 내어 조신(朝紳)을 헐뜯고 인심(人心)을 불안하게 하여 음험하게 간악한 짓을 시행하려는 계획을 만든다는 함이완의 내부고발이 있음을 아뢰었다. 이에 숙종은 이들을 모두 체포하여 의금부로.. 더보기
숙빈 최씨, 영조의 생모, 희빈 장씨의 저주굿을 발고하다. 숙빈 최씨, 영조의 생모, 희빈 장씨의 저주굿을 발고하다.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년 12월 17일(음력 11월 6일) ~ 1718년 4월 9일(음력 3월 9일))는 조선의 19대 왕 숙종(肅宗)의 총관후궁이자, 21대 왕 영조(英祖)의 생모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생애 충무위 부사과를 지내고 후일 증 영의정으로 추증된 최효원(崔孝元)과 남양홍씨의의 딸로서 1670년 12월 17일에 태어났다. 1936년 장봉선 등이 편찬한 정읍군지에 의하면 숙빈 최씨는 정읍현 태인면에서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랐다 한다. 그때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이 영광군수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에 태인의 대각교에서 남루한 소녀를 발견하게 되었다. 민유중의 부인 송씨가 불쌍히 여겨 데려다 키웠고, 인현왕후가 .. 더보기
장희빈의 최후, 사사되었나? 자진했나? 장희빈의 최후, 사사되었나? 자진했나?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년 11월 3일 (음력 9월 19일) ~ 1701년 11월 7일 ~ 9일 (음력 10월 8일 ~ 10일), 장희빈(張禧嬪))은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의 빈(嬪)으로, 제20대 왕 경종(景宗)의 어머니이다. 숙종 임금보다는 2년 연상이다. 본명은 장옥정(張玉貞),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아버지는 역관 출신인 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장형의 계실인 윤씨이다. 역관(驛官) 장현(張炫)의 종질녀이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이다. 산림숭용과 국혼물실을 당의 제1강령으로 추구했던 서인, 특히 인현왕후 민씨의 배경 세력이었던 노론에게 강력한 적으로 규정되었다. 1701년(숙종 36년) 숙빈 최씨.. 더보기
숙종, 명릉, 신통한 지관 갈처가가 택한 입지이다. 숙종, 명릉, 신통한 지관 갈처가가 택한 입지이다. 능의 구성 명릉은 19대 숙종과 그의 첫 번째 계비인 인현왕후, 두 번째 계비인 인원왕후 세 사람을 모신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히 조영되고, 인원왕후의 능은 다른편 언덕에 단릉 형식으로 모셔져 동원이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보통 우상좌하의 원칙에 따라 동원이강릉의 오른쪽 언덕을 왕이 차지하는 일반적인 왕릉과 달리 명릉에서 가장 낮은 서열의 인원왕후의 능이 가장 높은 자리인 오른쪽 언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명릉은 숙종의 명에 의해 능역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절감하여 부장품을 줄이고 석물 치수도 실물 크기에 가깝게 하는 등 간소한 제도로 조영하였는데, 이는 조선 능제의 분수령을 이루게 되었다. 8각 장명등도 4각..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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