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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

제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 이복형제 간의 왕위 쟁탈을 위한 골육상쟁 제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 이복형제 간의 왕위 쟁탈을 위한 골육상쟁 제1차 왕자의 난은 1398년 왕위 계승권을 에워싸고 일어난 왕자간의 싸움으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반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방원의 난으로도 불리며, 그밖에 방석의 난, 혹은 정도전의 난,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불린다. 제2차 왕자의 난이 동복(同腹) 형제간의 싸움이라면, 제1차 왕자의 난은 이복 형제간의 싸움이다. 원인 왕자의 난의 원인은 크게 세자 책봉 문제와 요동 정벌 준비에 따른 오해에서 비롯했다. 세자 책봉 문제 태조에겐 조선을 개국하기 전에 맞이한 두 명의 정처(正妻)가 있었는데, 한 명은 그가 무명 장수 시절에 고향에서 맞이한 한씨이며 다른 한 명은 군공으로 입신양명한 그가 개경에서.. 더보기
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2) 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2) 석방과 교육활동 1377년에유배에서 풀려나 4년간 선향 영주와 안동, 제천, 원주 등을 오가며 유랑하며 지냈다. 그 뒤 1381년 가을 거주가 완화되자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1382년 초려(草廬)를 지고 '삼봉재'(三峯齋)라 이름하고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권문세족들은 정도전을 위험 인물로 보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전국에서 많은 재생들이 운집하여 교육의 즐거움을 향유하였으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이곳 출신 재상이 삼봉재를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생들을 이끌고 부평부사 정의에 의탁하여 부평부 남촌(南村)으로 이사하여 후생 교육사업을 재기 하였으나 이곳 역시 재상 왕모(王某)가 별장을 짓는다고 학숙을 폐쇄하였다. 계속되는 멸시와 박해로.. 더보기
이색, 정도전의 스승, 성리학을 사회 개혁의 지향점으로 지목하다. 이색, 정도전의 스승, 성리학을 사회 개혁의 지향점으로 지목하다. 이색(李穡, 1328년~1396년 경상북도 영해군)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며 유학자, 시인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의 개혁, 지향점으로 지목하였다. 찬성사(贊成使) 이곡(李穀)의 아들이며, 이제현의 제자로서 그의 문하에서 성리학자들은 다시 역성 혁명파와 절의파로 나뉘게 된다. 정도전, 유창(劉敞) 등의 스승이었다.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에 부정적으로 보고 협조하지 않다가 의문의 최후를 맞이한다. 그는 이종학(李種學)의 아버지이고 박상충(朴尙衷)의 손윗처남이며 박은(朴誾)의 외숙부이고 고려 말.. 더보기
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1) 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 정도전 1342년~ 1398년 10월6일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의문신(文臣), 무신(武臣), 유학자이자 시인이며,외교관, 정치가, 유교사상가, 유학교육자이다. 조선의 초기 성리학자의 한사람이며,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三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별칭은 해동장량(海東張良)이다. 아버지는 형부상서 염의선생 정운경이고 어머니는 우연의 딸 영천 우씨이다. 본관은 봉화(奉化). 과거 급제 후 성균관 등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장려하였고, 외교적으로는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 여러 번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으며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정사를 논하다가 역성혁명론자가 되었다. 이후 정몽주, 이성계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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