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최영

임견미, 시샘이 많고 음흉했으며 당나라 간신 이임보에 견주다. 임견미, 시샘이 많고 음흉했으며 당나라 간신 이임보에 견주다. 임견미(林堅味, ? ~ 1388년 1월)는 고려 말의 무신이다. 공민왕 초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속하여 공을 세우고 중랑장에 등용되었다. 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적 침입 때 나주도병마사(羅州道兵馬使)로서 왕을 호종(扈從)해 1등공신이 됐다. 고려말 빈번했던 외적의 침입 때마다 군의 총책임을 맡았으며 특히 1368년 원나라 수도가 명나라 군에 의해 포위되는 등 중국 왕조 교체기의 고려 안보가 한 치 앞을 볼 수 없던 시점에 안주 순무사를 맡았다. 이후 문하시중에 오르는 등 이인임과 권문세족의 편에서 권세를 누리다가 1388년 이성계에 의해 제거됐다. 생애 고려의 무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임언수(林彦修)의 아들이다. 부친 임언수가 군.. 더보기
요동정벌, 이성계 일파의 4불가론 요동정벌, 이성계 일파의 4불가론 요동 정벌(遼東 征伐)은 명나라가 철령 이북 지역에 철령위를 설치하려는 것에 반발하여 고려가 요동을 경략(經略)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그러나, 이는 위화도 회군으로 이어져 고려를 멸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역시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요동 문제 요동은 남만주(南滿州) 요하(遼河)의 동쪽 지방으로, 요동반도(랴오둥 반도)를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한민족(韓民族)과 한족(漢族), 북방 민족 사이의 쟁탈 지역이 되어 왔다. 본래 고조선의 영역이었으나, 고조선이 기원전 290년경에 연나라 장수 진개와의 전쟁에 패해 서쪽 경계가 2천리 동쪽으로 이동함으로써 고조선의 판도에서 벗어났다. 전국시대 .. 더보기
홍건적의 난, 고려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다. 홍건적의 난, 고려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다. 홍건의 난(紅巾之亂) 또는 홍건적의 난(紅巾賊之亂)은 원 말기에 한산동(韓山童)을 수장으로 뭉친 백련교도가 중심이 되어 봉기한 한족의 농민 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기 때문에 홍건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홍건적은 홍적(紅賊)·홍두적(紅豆賊) 등으로도 불렸다. 개설 1348년 원나라에서는 절강의 방국진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 1351년에는 가노에 의해 황하의 개수 공사를 시키던 백련교도인 홍건당이 봉기했다. 그때 한산동은 미륵불(彌勒佛)이라 자칭하며 민심을 선동하였다. 그 뒤 한산동은 관군에게 붙잡혔으나 그의 부하 유복통은 군사를 일으켜 각지를 노략질하였는데, 그 군대는 10만에.. 더보기
이인임, 우왕을 섭정하고 문하시중까지 올랐으나 이성계와 최영에 의해 실각되다. 이인임, 우왕을 섭정하고 문하시중까지 올랐으나 이성계와 최영에 의해 실각되다. 이인임(李仁任, ? ~ 1388년)은 고려 말기의 간신(奸臣), 권신權臣)이자 시인(詩人)이었다. 그는 이성계의 최대 정적 중 하나였다. 그는 한때 신돈(辛旽)의 문하에 있었으며, 홍건적과 원나라의 최유 등을 물리쳤고, 우왕을 섭정하고 문하시중까지 올랐으나 이성계와 최영에 의해 실각되었다. 이성계의 사위 이제의 백부이다.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경상북도 출신이다. 호(號)는 승암(勝巖)이며 시호(諡號)는 황무(荒繆)이다. 생애 고려 경상도 성주군 고령현 성산면(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에서 대제학 이조년의 손자로 태어난 기록만 알려져 있는데 할아버지는 성산군 이조년(李兆年)이고, 아버지는 성산후 이포(李褒)이다. 본관은 .. 더보기
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2) 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2) 석방과 교육활동 1377년에유배에서 풀려나 4년간 선향 영주와 안동, 제천, 원주 등을 오가며 유랑하며 지냈다. 그 뒤 1381년 가을 거주가 완화되자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1382년 초려(草廬)를 지고 '삼봉재'(三峯齋)라 이름하고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권문세족들은 정도전을 위험 인물로 보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전국에서 많은 재생들이 운집하여 교육의 즐거움을 향유하였으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이곳 출신 재상이 삼봉재를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생들을 이끌고 부평부사 정의에 의탁하여 부평부 남촌(南村)으로 이사하여 후생 교육사업을 재기 하였으나 이곳 역시 재상 왕모(王某)가 별장을 짓는다고 학숙을 폐쇄하였다. 계속되는 멸시와 박해로.. 더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