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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부일구, 해시계로 과학·역사·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다. 앙부일구, 해시계로 과학·역사·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다. 앙부일구(仰釜日晷) 는 1434년 조선 세종대왕 16년 이후로 제작·사용된 해시계로, 과학·역사·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의 보물 제845호로 지정되었다. 앙부일구는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초기의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이때 제작된 앙부일구는 남아있지 않아 18세기에 제작된 것을 보물로 지정하였다. 보물로 지정된 휴대용 앙부일구는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작은 크기로 강건이 제작한 것이다. 《원사(元史)》〈천문지(天文志)〉「앙의(仰儀)」를 참고하였다고 한다. 오목한 화로 크기의 둥근 가마솥 시계판 모양 해를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앙부일구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목한 지구의처럼 생겨 시각선, 계절선을 나타내는 데 효과적이다. 청동을 재료로 하.. 더보기
장영실, 세종대왕이 아끼던 조선전기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세종대왕이 아끼던 조선전기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蔣英實, 1390년? ~ 1450년?)은 조선 전기의 관료이며 과학자, 기술자, 발명가이다. 경상남도 동래군 출생. 본관은 아산. 시조 장서의 9대손으로 추정된다.《세종실록》에선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는 원나라 유민의 소주(쑤저우)·항주(항저우) 사람이고,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 기생이었는데, 기술이 뛰어나 세종이 아끼었다고 설명한다. 전몰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산 장씨 종친회의 주장에 따르면 출생은 1385년~1390년(고려 우왕 11년~공양왕 2년)경이다. 또한 장성휘는 시조 장서의 8세손으로 고려 말 전서였으며 어머니는 동래현 관기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어머니와 장영실은 조선 관노로 전락하였다고 주장한다. 장영실은 동래현.. 더보기
진시황제의 분서갱유와 폭정, 대토목공사 진시황제의 분서갱유와 폭정, 대토목공사 분서갱유 기원전 213년, 함양궁에서 큰 연회를 베풀었다. 그때 시황제의 나이는 46세로 절정기였다. 연회도중 박사 순우월이 봉건제와 군현제를 놓고 복야 주청신과 언쟁을 벌였다. 이 때, 순우월이 봉건제로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승상 이사는 30일 내에 진나라의 역사와 의술, 농경등에 관한 책 이외의 모든 책들을 태워버리라 주청올렸고, 차제에 사적인 학문으로 정치를 비판하는 일체의 행동을 본원적으로 봉쇄하기위해 시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실행시켰다.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이다. 이듬해인 기원전 212년, 시황제는 방사 후생과 노생에게 불로장생의 약을 가지고 오라 명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은 시황제를 부덕을 비판하며 도망쳐 버리자 화가 난 시황제.. 더보기
카스트제도, 바르나, 원래의 목적은 분업에 있었다. 카스트제도, 바르나, 원래의 목적은 분업에 있었다. 카스트제( - 制, 신분제)는 세계의 수많은 전근대 사회에서 나타났던 문화·사회적 현상으로, 일정 신분계층집단의 지위를 자손 대대로 세습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신분의 분류는 주로 집단의 경제력, 정치적 권력, 사회 문화에 기인되어 이루어진다. 카스트제 아래에서, 특별한 정변이 일어나거나, 개인적 능력이 매우 우수한 사례 등의 예외가 일어나지 않는 한 계층이동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반적으로, 카스트제는 주로 인도의 신분계층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인도에서는 1947년 법적으로 금지되었지만 아직도 중장년이나 노년계층 또는 시골사람들에게는 인식속에 남아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아직 카스트제의 풍습이 남아있고, 대략 2억 5000만 명 정도의 세계 .. 더보기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 사상과 상업이 발달하다.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 사상과 상업이 발달하다.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년 ~ 기원전 221년)는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를 아울러 부르는 말로, 기원전 770년 주(周)왕조의 천도 후부터 기원전 221년 시황제(始皇帝)의 통일까지에 해당된다. 선진 시대(先秦時代)라고도 한다. 이 시대는 중국사상의 개화결실의 시기였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을 제자(諸子)라 하며 그 학파들을 백가(百家)라 부른다. 상업이 많이 발달하였고 이때부터 철기가 사용되었다. 주나라가 견융족에 의해 도읍을 동주로 옮기자 주 왕실이 약화되어 봉건제가 약화됨에 따라 각각의 제후국들은 철제 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발전시키고 인재를 등용하여 주왕실에 반기를 들고 춘추 전국 시대의 패자가 되기 위해 치열한 전쟁 및 제자백가사상.. 더보기
주나라, 봉건제도를 실시한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 유지된 나라 주나라, 봉건제도를 실시한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 유지된 나라 주(周,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나라는 상나라를 이어 중국에 존재했던 나라이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유지된 나라로, 이 시기에 철기의 사용이 시작되었다. 주나라는 기원전 11세기 중엽에 서쪽의 웨이허 강 분지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지배했다. 주나라의 청동기문화권이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주나라의 영향력은 중원에서 더욱 남쪽 지방인 장쑤(江蘇), 안후이(安徽), 후 베이(湖北) 등의 양쯔강 유역에까지 미친 것이 확실해졌다. 봉건제도는 이러한 광대한 영역을 유효하게 통치하려는 목적에서 발현되었다. 주 왕조는 농업을 장려하였고 농지의 개척을 진척하였으나, 농기구는 목재나 석재로 만들어졌다. 기원전.. 더보기
남은,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습격을 받다. 남은,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습격을 받다. 남은(南誾, 1354년 ~ 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무신으로, 본관은 의령이다. 고려 말기에 왜구 토벌과 신진사대부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 개국에 공을 세웠다. 개국공신 1등으로 의성군에 봉해졌고,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뒤 의성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본관은 의령이고, 시호는 강무(剛武)이다. 행촌 이암의 외손녀사위이기도 하다. 남은은 1354년 검교시중(檢校侍中) 남을번(南乙蕃)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후일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영의정을 지낸 남재(南在), 아우는 우상절도사(右廂節度使)를 지낸 남지(南贄)이다. 후일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나, 장군 남이는 형 남재의 후손들이었다. 어려.. 더보기
원경왕후, 태종의 비, 가장 정치적인 왕비 원경왕후, 태종의 비, 가장 정치적인 왕비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년 7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420년 8월 18일 (음력 7월 10일))는 조선 태종(太宗)의 왕비이자 조선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모후이다. 여흥부원군 문도공 민제(驪興府院君 文度公 閔霽)의 둘째 딸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남편 태종이 왕이 되는 데 막대한 역할을 했으나 후일 남편에 의해 친정이 멸문당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조선 왕조에서 정희왕후, 문정왕후와 더불어 가장 정치적인 왕비이며, 성격 또한 담대하고 괄괄하였다. 개경 철동에서 태어났다. 18세인 1382년에 황산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 이성계의 5남이자, 아버지 민제의 제자인 이방원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결혼 후 10년 동안 위화도 회군,..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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