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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전투, 고구려와 당 전쟁, 끈질긴 항전으로 고구려가 승리하다. 안시성 전투, 고구려와 당 전쟁, 끈질긴 항전으로 고구려가 승리하다. 안시성 전투는 고구려-당 전쟁 중에 645년(보장왕 4)에 당나라 태종이 지휘하는 군대가 대규모로 고구려를 침공하여 3개월가 량 안시성을 포위, 공격했으나 끈질긴 항전으로 이를 물리치고 고구려가 승리한 싸움이다. 전투 개요 644년 6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당태종은 마침내 고구려의 침략을 명령한 후 11월 수륙 양면으로 약 50만 명에 달하는 대규 모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당군은 각종 공성용(攻城用) 기구를 총동원했다. 당 태종은 다음해 2월에 낙양(洛陽)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 또한 돌궐과 거란으로 구성된 이민족의 군대도 다수 동원되었으며 대다수의 군대가 예전 수나라 때의 원정군과는 질적으로 다 른 .. 더보기
영창대군, 강화도에서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죽어가다. 영창대군의 묘 영창대군, 강화도에서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죽어가다.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년 4월 12일/음력 3월 6일 ~ 1614년 3월 19일/음력 2월 10일) 조선 제14대 왕 선조와 그의 계비 인목왕후의 아들로 성은 이(李), 이름은 의(㼁), 본관은 전주(全州) 이다. 선조에게는 적자와 서자를 합해 총 1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영창대군은 선조가 55세 때 얻은 유일한 적자이다. 이 때문에 영의정인 소북의 유영경등은 한때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추대하려 했고, 이는 후에 그가 억울하게 처형당하는 원인 이 되었다. 생애 1606년 4월 12일(음력 3월 6일)에 선조와 인목왕후의 유일한 적장자로 태어나 1614년 3월 19일(음력 2월 10일)에 강화 유배지에 서 사망했다. 선조는 .. 더보기
인목대비 폐비 사건, 영창대군 추대 사건을 빌미로 폐위되다. 인목대비 친필 인목대비 폐비 사건, 영창대군 추대 사건을 빌미로 폐위되다. 인목대비 폐비 사건 또는 인목대비 폐모 사건은 1618년 조선 조정에서 대비였던 인목왕후를 대비에서 폐하고 서궁(西宮) 에 감금, 유폐시킨 사건을 말한다. 칠서의 변과 영창대군 추대 사건을 빌미로 북인은 인목왕후의 폐비를 주장했고, 허균, 이이첨 등은 적극 폐비론을 주도해 나 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서인과 남인에 의해 패륜아로 몰려 정죄당하게 된다. 원인 1608년 소북의 유영경은 선조의 마음이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하였다. 그러나 5세 된 어린아이를 왕으로 세우고 섭정을 하는 것이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한 인목왕후는 광해군에게 보위를 넘긴다. 그러나 유영경은 영창대.. 더보기
사문난적, 유교 이념에 반대하는 사상을 비난하다. 박세당 사문난적, 유교 이념에 반대하는 사상을 비난하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고려와 조선시대에 성리학 또는 유교 이념에 반대하는 사람 또는 사상을 비난, 공격하는 용어였다. 사문(斯文)은 유학(儒學)을 가리킨다. 한국에는 고려말에 사문난적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으며 성리학이 국시가 되면서 반역자에 준하는 역적 취급을 받았다. 성리학이 교조화된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상대방 붕당의 당인들을 매장시키는 악의적인 용어로 활용되었다. 윤선도, 윤휴, 허목, 윤증, 박세당 등이 사문난적으로 몰려 곤욕을 당했다. 개요 본래 사문난적이라는 단어는 고대 중국에서 사이비 학문으로 궤변을 펼치는 변설가들을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였다. 고려말기 성리학이 도입될 때부터 나타나 존재하였으나 주로 활용된 것은 조선중기,.. 더보기
망이·망소이의 난, 고려시대의 민중 봉기 망이·망소이의 난, 고려시대의 민중 봉기 망이·망소이의 봉기(亡伊亡所伊-蜂起)는 고려 무인 집권 때 사회질서가 문란해진 틈을 타서 일어난 민중 봉기이다. 고려 시대 특수 행정구역이었던 향, 소, 부곡에 해당된 수공업자의 집단 거주지인 공주 명학소의 망이와 망소이는 1176년 고려 명종 6년 음력 1월 굶주린 무리를 모아 봉기하여 공주를 함락하였다. 고려 조정은 선유(宣諭)에 실패하여, 정황재(丁黃載)와 장박인(張博仁)에게 이것을 진압하게 했으나 쉽지 않자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 으로 승격하게 하는 등 회유(懷柔)해서 봉기를 접게하려고 했다. 그러나 불응하고 예산현을 공략한 봉기민(蜂起民)들은 1177년고려 명종 7년 정월에 관군의 진압에 항복했다가 조정의 비열한 처사에 불 만하고 그 해 2월 재봉기하였.. 더보기
문체반정, 패관소설의 수입을 금하고 중국의 고문들을 신간하다. 문체반정, 패관소설의 수입을 금하고 중국의 고문들을 신간하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은 조선 정조가 당대에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같이 참신한 문장들을 패관소품이라 규정하고, 기 존 고문(古文)들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발단 개혁군주라고 하는 정조가 새롭게 유행하는 소품체 문체를 걱정하며 고전의 문체로 돌아가라고 신하들과 선비들에게 명했다. 이를 위해서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고, 패관소설과 잡서 등의 수입을 금하였으며, 중국의 고문들을 신간하였다. 이에 대해서 정조가 책과 사상을 탄압하는 등 보수적인 면모라고 평가하는 주장도 있는 반면에, 단순히 정조가 남인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노론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박지원을 볼모로 삼기 위한 정치적인 노림수였다는 주장이 있다. 경과 .. 더보기
나선정벌, 청나라와 러시아의 국경분쟁에 휘말리다. 나선정벌, 청나라와 러시아의 국경분쟁에 휘말리다. 청-러시아 국경 분쟁(1652년 ~ 1689년)은 코사크가 아무르 강 이북의 청나라 영토를 점유하려고 시도하여, 러시아(당시 루 스 차르국)와 청나라 사이에 불거진 일련의 간헐적인 소규모 군사 충돌이다. 1686년에 청군이 알바진의 코사크 요새를 공략하고 1689년에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음으로써 그동안의 적대적 행위는 막을 내 렸다. 분쟁의 배경 시베리아의 남동쪽 구석, 스타노보이 산맥의 남쪽 지역이 분쟁의 배경이 되었다. 수문학(水文學)적으로, 스타노보이 산맥은 북쪽으로 흘러 북극해로 흘러들어가는 강들과 남쪽으로 흐르는 아무르 강을 나누 는 분수령이 된다. 생태학적으로 이 지역은 시베리아 타이가의 남동쪽 끝부분으로, 농업에 적합한 구역이 다소 섞여 있다.. 더보기
시모노세키 조약, 청일전쟁의 강화회의로 체결된 조약 시모노세키 조약, 청일전쟁의 강화회의로 체결된 조약 시모노세키 조약(한자: 下關條約 하관조약, 일본어: 下關条約, 중국어 간체: 马关条约, 정체: 馬關條約)은 1895년 3월 20일부 터 야마구치 현 시모노세키 시에서 열린 청일전쟁의 강화회의로 체결된 조약이다. 4월 17일 일본제국의 이토 히로부미와 청나라의 이홍장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5개 항목으로 청나라의 조선간섭을 물리치고 일본이 조선과 만주까지 지배력을 뻗칠 수 있게 하였다. 배경 청나라와 일본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전쟁이다 .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중일갑오전쟁(중국어 간체: 中日甲午战争, 정체: 中日甲午戰爭), 일본에서는 일청전쟁(日清戦争), 서양에서는 제1차 중일..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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