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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어릴때부터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형제간의 우애가 두터워 병든 동생을 정성스럽게 간호해 주다. 인종, 어릴때부터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형제간의 우애가 두터워 병든 동생을 정성스럽게 간호해 주다. 인종(仁宗, 1515년 3월 10일 (음력 2월 25일) ~ 1545년 8월 7일(음력 7월 1일))은 조선의 제12대 임금(재위 1544년 ~ 1545년)이다. 성은 이(李), 휘는 호(峼),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천윤(天胤)이다. 사후 시호는 인종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仁宗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이며 중종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이며, 비는 첨지중추부사 박용(朴墉)의 딸인 인성왕후이다. 생애 인종은 실록에 따르면, "전하께서는 어릴때부터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화려한 치장을 한 궁녀들을 쫓아내었고, 우애가 깊어 병든 동생을 정성스럽게 간호해주었다."라는 구절이 .. 더보기
덕흥대원군, 선조는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다가 끝내 추존하지 못하다. 덕흥대원군, 선조는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다가 끝내 추존하지 못하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년 4월 2일 ~ 1559년 6월 14일)은 조선 중기의 왕자이며 조선 최초의 대원군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휘는 이초(李岹), 자는 경앙(景仰), 아명(兒名)은 이환수(李歡壽)이다.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의 사친(私親)으로 선조는 생부인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는 당시 적서를 가리던 그 시대에, 중종 임금의 서자였고, 선조는 서얼 콤플렉스와 방계승통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다고 분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순조 때 왕족 아들의 수가 귀해지자 선조의 왕자군(王子君) 후손들에게 왕위 계승권을 적용시켰다가 결국 뒤이어 덕흥대원군의 직계 후손들에게도 왕위 계승권을.. 더보기
명종, 자신의 세력기반을 지니지 못한 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속에서 왕위를 지키다. 명종, 자신의 세력기반을 지니지 못한 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속에서 왕위를 지키다. 명종(明宗, 1534년 7월 3일 (음력 5월 22일)~ 1567년 8월 2일 (음력 6월 28일))은 조선의 제13대 임금이다. 성은 이(李), 휘는 환(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대양(對陽). 사후 시호는 명종공헌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明宗恭憲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이며 중종의 차남으로 문정왕후의 유일한 친아들이다. 이복 형 인종(부왕 중종의 적장자)이 후사 없이 붕어하기 3일 전 인종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로 모후인 문정왕후의 섭정, 친정 이후에는 외척인 윤원형, 윤원로, 윤춘년, 윤백원, 이량, 심연원, 심통원 등에 의해 정사가 좌지우지되면서 혼란을 겪었다. 아들 순회세자를 일찍 잃고 이복.. 더보기
고종 양위 사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추궁해 강제로 순종에게 양위하다. 고종 양위 사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추궁해 강제로 순종에게 양위하다. 고종 양위 사건(高宗讓位事件)은 1907년 7월 20일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는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제위를 순종에게 위임했다가 바로 양위한 사건이다. 고종이 헤이그 회의에 이상설과 이준 등을 보내 밀서를 전달하려 한 사실을 접한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책임을 추궁했고 ,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당시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은 고종이 책임지고 퇴진하는 것으로 사태를 종결하려 했으나,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원인 고종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에게 헤이그 밀사 편으로 밀서를 전달하였다. 1907년 7월 1일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앞으로 날아온 한 장의 전문이 한국 황실.. 더보기
이토 히로부미,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한 인물 이토 히로부미,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한 인물 이토 히로부미(일본어: 伊藤博文 (いとう ひろぶみ), 문화어: 이또 히로부미, 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는 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조슈 번사)이자 일본 제국의 헌법학자, 정치가이다. 일본 제국의 초대 내각총리대신이며 조선통감부의 통감을 역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 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제5대·제7대·제10대 일본 제국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또한 초대·제3대·제8대·제10대 추밀원 의장,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귀족원 의장, 관선 효고 현 지사 등을 지냈다. 입헌정우회를 결성해 원로로 활동했다. 대훈위 종일위(從一位)를 받고, 작위는 백작이며, 사후 공.. 더보기
김좌진, 한국의 무장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다. 김좌진, 한국의 무장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다. 김좌진(金佐鎭, 1889년 12월 16일 ~ 1930년 1월 24일)은 일제 강점기의 군인이자 독립운동가이었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으며, 김동삼, 오동진 등과 3대 맹장(猛將)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피살되었다. 본관은 신 안동. 김상용의 11대손이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나이 17세에 집안의 가노를 해방 및 땅을 분배하였고 민족적 자립을 위한 한국의 무장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는 동시에 국가의 미래를 위한 교육사업도 활발히 펼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출생과 성장 1889년 12월 16일(음력 11월 24일) 충청남도 홍성군 .. 더보기
이범윤, 간도관리사로 임명되어 간도 지역 조선인에 대한 행정 업무를 전담하다. 이범윤, 간도관리사로 임명되어 간도 지역 조선인에 대한 행정 업무를 전담하다. 이범윤(李範允, 1863년 12월 29일 ~ 1940년 10월 20일)은 대한제국의 간도관리사를 지낸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무위대장을 지낸 조선 말기의 무관(武官) 이경하(李景夏)의 아들이고 구한말의 정치가 이범진(李範晋)의 아우이며 구한말의 외교관 이위종(李瑋鍾)의 숙부이다. 1863년 12월 29일 경기도 고양 출생이다. 구한 말 간도 문제로 청나라와의 갈등 끝에 변계경무서가 설치된 뒤 1899년 37세 때 음서 천거로 관료가 되어 1902년 간도시찰로 임명되기까지의 경력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간도로 파견되었고, 이듬해에는 간도관리사로 임명되어 간도 지역 조선인에 대한 행정 업.. 더보기
해부루왕, 해모수왕의 아들이며 금와왕의 아버지이다. 해부루왕, 해모수왕의 아들이며 금와왕의 아버지이다. 해부루(解夫婁, ? ~기원전 60년경는 부여의 국왕으로 해모수왕의 아들이며, 금와왕의 아버지이다. 생애 해모수의 아들로 부여의 왕위를 계승한 해부루는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천제(天帝)의 계시를 받아 도읍을 옮길 것을 청하자, 그에 따라 동쪽 바닷가의 가섭원(迦葉原)이라는 곳으로 나라를 옮겨 이를 동부여라고 하였다. 해부루가 옮겨간 뒤에 원래 도읍지에는 동명제(東明帝)가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 이 있으며, 다른 전승에 따르면, 해부루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옮겨간 뒤에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부여는 해부루대에 동해의 바닷가에 있는 ‘가섭원(迦葉原)’으로 천도를 하고, 국호를 동부여라 하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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