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전체보기

경술국적, 대한제국에서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찬성한 여덟명의 친일파 경술국적, 대한제국에서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찬성한 여덟명의 친일파 경술국적(庚戌國賊)은 1910년 8월 대한제국에서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찬성, 협조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이완용의 처남인 승녕부총관 조민희 여덟 명의 친일파를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합방의 공을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으며,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전원 선정되었다. 명단 ☞ 연관글 [역사보기] - 이완용, 을사오적, 약육강식의 시.. 더보기
이완용, 을사오적, 약육강식의 시대에 조선의 독립 기도는 허망할 뿐이라며 망언하다. 이완용, 을사오적, 약육강식의 시대에 조선의 독립 기도는 허망할 뿐이라며 망언하다. 이완용(李完用, 1858년 7월 17일(음력 6월 7일) ~ 1926년 양력 2월 12일)은 대한제국의 외교관, 정치가, 매국노, 친일파이다. 일제에 적극 협력한 대가로 조선귀족 백작 작위를 받았고, 1919년에는 후작에 올랐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조선사 편수회 고문 등을 지냈다. 본관은 우봉(牛峰)이며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이다. 문과 급제 후 수구파로서 청나라 양무 운동 모델의 근대화를 추구했고, 신교육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주미공사를 역임하는 등, 대한제국 내의 미국 전문가이자 내각의 실세로서 대미협상을 전담했지만, 정작 미국이 제 잇속만 .. 더보기
갑술환국, 왕권 강화를 위해 특정한 원인이 없이 두 여인의 당파를 번갈아 기용한 것으로 해석되다. 갑술환국, 왕권 강화를 위해 특정한 원인이 없이 두 여인의 당파를 번갈아 기용한 것으로 해석되다. 갑술환국(甲戌換局)은 1694년(숙종 20년) 4월 1일에 발생한 숙종 시대의 3차 환국으로, 기사환국이 발생한 1689년 2월 2일 이후로 정권을 집권해온 남인이 몰락하고, 기사환국 때 몰락했던 서인(노론·소론)이 재집권한 사건이다. 과정 숙종 20년(1694년) 3월 23일, 민암(閔黯)이 한성 내 노·소론가의 자제들이 재물을 모아 환관(宦官)·폐인(嬖人)과 척가(戚家)에게 뇌물을 써서 거짓말과 허위의 풍문(風聞)을 만들어 내어 조신(朝紳)을 헐뜯고 인심(人心)을 불안하게 하여 음험하게 간악한 짓을 시행하려는 계획을 만든다는 함이완의 내부고발이 있음을 아뢰었다. 이에 숙종은 이들을 모두 체포하여 의금부로.. 더보기
정미칠적, 한일신협약 조인에 찬성한 내각 대신 일곱 친일파 정미칠적, 한일신협약 조인에 찬성한 내각 대신 일곱 친일파 정미칠적(丁未七賊)은 대한제국에서 을사늑약 체결 2년 후인 1907년 7월에 체결된 한일신협약(제3차 한일협약 또는 정미7조약) 조인에 찬성한 내각 대신 일곱 친일파를 가리킨다. 이완용을 비롯하여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군부대신 이병무,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부대신 조중응, 학부대신 이재곤, 내부대신 임선준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 명의로 체결된 정미7조약 조인에 찬성하고 순종의 재가를 얻도록 협조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정미칠적 모두가 선정되었다. 명단 ☞.. 더보기
안정복,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와 사료 연구, 후학 양성과 집필에 몰두하다. 안정복,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와 사료 연구, 후학 양성과 집필에 몰두하다. 안정복(安鼎福, 1712년 ~ 1791년 7월 20일)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리학자, 작가, 역사가, 수필가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이다. 성호 이익(李瀷)의 문인으로서 스승의 문하에서 나온 뒤에도 계속 이익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의 지도를 받았다. 《성호사설》을 해석, 일부 수정한 《성호사설유선》을 편찬하였다. 여러가지 지식을 담은 《잡동산이 雜同散異》는 잡동사니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실학자이자 역사가이지만 성리학자이기도 하여 1767년(영조 43년)에는 왕명으로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어려운 구문을 해석,.. 더보기
윤원형, 사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1907년 이완용의 건의로 사면 복권되다. 윤원형, 사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1907년 이완용의 건의로 사면 복권되다. 윤원형(尹元衡, 1509년 ∼ 1565년 11월 18일)은 조선 중기의 외척이자 문신으로, 파산부원군 윤지임과 전성부대부인 전의 이씨(全城府夫人 全義李氏)의 넷째 아들이자 문정왕후의 남동생이며, 윤원량 · 윤원로의 동생이며 소윤(小尹)의 영수이다. 명종의 외숙으로 윤임, 김안로, 이량, 심통원 등과 함께 인척세력의 대표적 인물이며 을사사화를 날조했다. 정난정은 그의 첩이었다. 본관은 파평(波平). 자는 언평(彦平)이다. 1533년(중종 28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외조카인 경원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노력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친족인 윤임, 처당숙 김안로(金安老) 등과 갈등했다. 김안로의 공격으로 유배되었.. 더보기
정한론, 일본 교과서 역사 왜곡 논란에서 자주 지적되다. 정한론, 일본 교과서 역사 왜곡 논란에서 자주 지적되다. 정한론(일본어: 征韓論 (せいかんろん) 세이칸론) 또는 정조론(征朝論)은 19세기 말 당시, 일본이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사상 또는 신념이다. 1860년대의 일본 군국주의자에게서 나왔으나 1884년 갑신정변 실패 이후에는 조선에 호의적이던 인사들에게서도 정한론이 대두되었다. 배경 처음에는 정조론(征朝論)이라 불렀으나, 朝(조)가 “조정”(곧 일본 왕)을 뜻한다고 오해를 살 수 있다고 여겼으므로, 정한론으로 바뀌었다. 막말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에 당시 정부의 수뇌인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고토 쇼지로, 소에지마 다네오미 등에 의해 주장된, 무력을 이용해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책이다. 에도 시대 후기부터 고대 일본이 한반도.. 더보기
도요토미 히데요시, 임진왜란에 반대한 다이묘들 도요토미 히데요시, 임진왜란에 반대한 다이묘들 도요토미/도요토미노/하시바 히데요시(豊臣/羽柴秀吉 (とよとみ/とよとみ の/はしば ひでよし), 1537년 3월 17일 ~ 1598년 9월 18일)는 센고쿠 시대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활약했던 무장, 정치가이며 다이묘이다.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전국 3영걸로 불린다. 또한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도요토미라는 성을 하사받기 이전에 하시바 히데요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 자신의 가신(家臣)이기도 했던 일본의 무장 가토 기요마사의 어머니 이토는 히데요시의 6촌 여동생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와리 국(尾張国) 아이치 군(愛知郡) 나카무라(中村)에서 빈농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섬겼으며 오다 가문 .. 더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