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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신숙주, 사후 그의 검소함과 겸손함이 묻혀지게 되다. 신숙주, 사후 그의 검소함과 겸손함이 묻혀지게 되다. 남이의 옥사 전후 1468년 세조는 죽음을 앞두고 '당 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숙주'라고 말했다고 한다. 세조가 신숙주를 당 태종의 위징에 비견한 것은 자신도 당 태종처럼 신숙주를 통해 문화 통치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신숙주를 신뢰했다는 뜻이 된다. 1468년 세조가 병으로 죽고 예종이 어려서 즉위하자 신숙주는 한명회, 구치관, 정인지 등과 함께 원상(院相)의 한사람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정희왕후와 함께 서정(庶政)을 처결하고 혼란을 수습하였으며, 예종 즉위 후 남이의 옥사가 발생하자 그는 유자광 등과 함께 위관으로 참여, 남이 장군과 강순 등을 심문한 뒤 숙청하여,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에 책록되었.. 더보기
박원종, 왕실과의 겹사돈, 중종을 옹립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다. 박원종, 왕실과의 겹사돈, 중종을 옹립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다. 박원종(朴元宗, 1467년 ~ 1510년)은 조선 전기의 무신(武臣) 겸 정치가(政治家)로 자는 백윤, 시호는 무열로 본관은 순천이다.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의 처남이자 윤임과 장경왕후의 외숙부이기도 하다. 승평부부인이 자결하자 연산군에게 앙심을 품고 정변을 준비, 유순정, 성희안 등을 포섭하여 1506년 중종반정을 기획한다. 중종반정 직후인 1506년 9월부터 이듬해 1507년 8월까지 중종 임금을 보좌하여 섭정을 맡았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일족이기도 하다. 왕실과의 겹사돈 판서 박중선의 아들로 부지돈녕부사 박거소(朴去疎)의 손자이다. 증조부 평양군 박석명(朴錫命)은 좌정승 박가흥의 큰아들이자 고려 공양왕의 조카사위로 대사헌을 지.. 더보기
정현왕후, 자순대비, 중종을 왕으로 세우는 것을 승낙하다. 정현왕후, 자순대비, 중종을 왕으로 세우는 것을 승낙하다.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1462년 7월 21일 (음력 6월 25일)~1530년 9월 13일 (음력 8월 22일)는 조선 성종(成宗)의 둘째계비이다. 시호는 자순화혜소의흠숙정현왕후(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이다. 자순대비(慈順大妃)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영원부원군 평정공 윤호(鈴原府院君 平靖公 尹壕)와 연안부부인 전씨(延安府夫人 田氏)의 딸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중종반정 시 중종을 왕으로 세우는 것을 승낙한 인물로 유명하다. 능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선정릉 내에 위치한 선릉(宣陵)으로, 남편 성종과 동원이강의 형태로 같이 묻혀 있다. 1462년 7월 21일 (음력 6월 25일)에 태어나 1530년 9월 13일 (음력 8월 22일).. 더보기
성희안,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옹립하였다 성희안,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옹립하였다. 성희안(成希顔, 1461년 1월 ~ 1513년 7월)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 작가, 외교관으로 자는 우옹(愚翁), 호는 인재(仁齋), 시호는 충정, 본관은 창녕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관직에 올랐으나 연산군을 풍자하는 시를 썼다가 관직이 부사용으로 강등당한다. 이후 중종 반정에 적극 참여하여 성사시켰고, 주요 반정 공신의 한사람이었다. 반정 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김종직의 문인이다. 생애 초반 돈령부판관 성찬(成瓚)과 그 부인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덕천군 이후생(李厚生)이다. 일찍이 점필재 김종직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사사하였다.. 더보기
중종, 왕권을 신권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만 하다. 중종, 왕권을 신권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만 하다. 중종(中宗, 1488년 4월 16일 (음력 3월 5일) ~ 1544년 11월 29일 (음력 11월 15일), 재위: 1506년~1544년)은 조선의 제11대 왕이다. 휘는 역(懌),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 자는 낙천(樂天)이며, 사후 시호는 중종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이다. 묘호는 중종(中宗)으로 결정되었는데 연산군으로부터 나라를 구하여 중흥시켰다는 의미로 정해진 것이다. 반대로 38년의 재위기간 중에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그저 가운데 중(中)자를 썼다는 해석도 있다. 인종은 '종'(宗) 자로는 부족하다 하여 중조(中祖)를 제안했는데, 중종을 연산군 대신 잇는 왕으로써 '조'(祖)를 붙이는 것은.. 더보기
인수대비, 소혜왕후,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 소혜왕후,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1437년 10월 7일(음력 9월 8일) ~ 1504년 5월 11일(음력 4월 27일)는 조선 초기의 세자빈이자 덕종(德宗, 추존왕)의 왕비이며 시호는 인수자숙휘숙명의소혜왕후(仁粹慈淑徽肅明懿昭惠王后)이다.1450년(문종 즉위년)에 수양대군의 큰아들인 도원군(의경세자, 덕종)과 혼인하여 군부인에 봉작되었으며, 1455년(세조 즉위년)에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왕위로 즉위하여 자신은 맏며느리로서 세자빈이 되어 궁궐에 들어갔으나, 1457년(세조 3년)에 남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어 사가로 물러났다. 그러나 1469년에 자신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성종)이 왕위에 등극하고, 자신도 궁궐에 다시 들어가 곧 왕비로 진봉되었다가 1475.. 더보기
덕종, 경릉, 왕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다. 덕종, 경릉, 왕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다. 능의 구성 경릉은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추존이란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세상을 떠난 후에 왕의 호칭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덕종은 왕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의경세자의 시호를 받았으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경릉은 서오릉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능으로,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園異岡陵)의 형태이다. 원칙적으로는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왕, 오른쪽 언덕(동쪽)이 왕비의 능이지만, 경릉은 오른쪽 언덕(동쪽)에 덕종을 모셨고 왼쪽 언덕(서쪽)에 소혜왕후를 모셨다. 이는 덕종은 왕세자의 신분으로, 소혜왕후는 대왕대비의 신.. 더보기
폐비 윤씨,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내어 폐비가 되다. 폐비 윤씨,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내어 폐비가 되다.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55년 7월 15일 (음력 윤 6월 1일) ~ 1482년 8월 29일 (음력 8월 16일))는 조선의 제9대 왕 성종의 계비이 며 둘째부인이다. 조선 10대 왕 연산군과 대군을 낳았으므로 두아들에겐 생모가 된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에 지위에 있다가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王妃)로 책봉되었으나 남편 용안에 상처 를 내어 폐비(廢妃)당했다. 그러나 연산군 즉위후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왕비(王妃)의 작호가 추존되었다. 봉상시 판사(奉常寺 判事)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 尹起畝) 와 장흥부부인 신씨(長興府夫人 申氏)의 딸로 윤관의 11대손 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남편인 성종의 후궁들 문제로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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