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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곽재우, 이순신의 죽음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을 하다.(2) 곽재우, 이순신의 죽음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을 하다. 정유재란과 종전 1597년(선조 30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이 파행으로 결렬되고 일본과의 전쟁이 재발할 위험성이 커지자 곽재우는 조선 정부의 부름으로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에 임명되었다. 경상좌도방어사로 그는 현풍의 석문산성을 신축하였으나, 산성이 완공되기도 전에 왜군이 근처까지 침입하여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그해 음력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마을에서 일본군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 사촌형 곽재겸 등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쌓고 성곽을 수비하였고, 창녕에서부터 현풍, 달성 일대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1597년 전쟁 중 .. 더보기
양녕대군, 시와 서에 능했지만 부왕 태종에게 신망을 잃다. 양녕대군, 시와 서에 능했지만 부왕 태종에게 신망을 잃다. 부왕 태종과의 갈등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여색을 금하고 인군으로서의 자질과 덕망을 쌓으라 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부왕 태종이 여색을 밝히고 후궁을 들이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가 들인 후궁을 태종이 내침으로서 부왕 태종과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1417년 태종이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라고 준 왕친록(王親錄)을 열어봤다가 발각, 이것이 소문으로 퍼지면서 부왕 태종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 또한 전중추 곽선(郭旋)의 첩을 취한 사실도 밝혀졌다. 당시 조선에서 붓을 잘 만든다고 소문이 난 김호생이란 이가 있었다. 그는 사족 출신으로 붓을 만들었는데 호기심에 양녕은 김호생을 찾아가 그가 붓을 만드는 것을 보았고, 몰래 대궐에 들어와 세자에게 붓을 만들게 하였다... 더보기
단종, 노산군, 숙종 때 복위되어 단종으로 묘호가 정해지다. 단종, 노산군, 숙종 때 복위되어 단종으로 묘호가 정해지다. 단종(端宗, 1441년 8월 9일 (음력 7월 23일) ~ 1457년 11월 7일 (음력 10월 21일), 재위 1452년~1455년)은 조선의 제6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이고, 휘는 홍위(弘暐)이다. 1455년 숙부 세조의 정변으로 양위하였다가, 세조 측근들의 탄핵으로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사사 혹은 교살 되었다. 폐위되어 죽어서 시호를 받지 못한 채 노산군(魯山君)으로 불리다가 이후 중종 때에 복권 상소가 올려졌으나 거절당했고, 숙종 대에 가서야 성리학자들의 건의로 정종과 함께 복위되어, '예(禮)를 지키고 의(義)를 잡는다' 라는 뜻의 단종(端宗)으로 묘호가 정해졌으며, 정식 시호는 단종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 더보기
이익, 성호사설, 신분제 타파와 이혼 옹호론을 펼치다. 이익, 성호사설, 신분제 타파와 이혼 옹호론을 펼치다. 여성 교육에 대한 비판 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거치면서 여자의 권리 상승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했다. 특히 일부 사대부가와 중인층에서 딸에게 글공부를 가르치는 것을 잘못이라 생각하였다. 여자들에게도 글공부와 학문을 가르치는 조선 후기의 풍조를 그는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그는 '여자는 열심히 일하고 검소해야 하며,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을 지켜야 한다. 고 했다. 독서나 강의는 남자가 할 일이지 여자가 할 일이 아니다. 여자들은 아침상을 준비하고,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장면하고 길쌈도 해야 하는데 언제 책을 읽을 시간이 있겠는가? 그리고 학식이 있다 하는 부인들을 보면 배운 것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나쁜.. 더보기
인원왕후, 숙종의 두 번째 계비, 영조의 방패막이 되어주다. 인원왕후, 숙종의 두 번째 계비, 영조의 방패막이 되어주다.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1687년 11월 3일/음력 9월 29일 ~ 1757년 5월 13일/음력 3월 26일)은 조선 숙종의 두 번째 계비이다. 1687년 11월 3일(음력 9월 29일)에 태어났다. 인현왕후의 승하 이후 1702년(숙종 28) 10월 3일에 16세의 나이로 숙종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경종 즉위한 이후에는 왕대비가 되었고, 영조 즉위 이후에는 대왕대비가 되었다. 소론의 딸이었지만 남편 숙종의 사후 노론으로 당색을 바꿨다. 초기에는 천연두, 홍역, 치통, 종기 등을 앓았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숙빈 최씨 , 영빈 김씨와 가깝게 지냈으며 숙빈 최씨 소생인 연잉군을 지지해 왕세제 책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연잉군이 역모.. 더보기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인조에 의해 법살당하다.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인조에 의해 법살당하다. 민회빈 강씨(한자: 愍懷嬪 姜氏, 1611년 ~ 1646년 4월 30일/음력 3월 15일)는 조선 소현세자의 부인이다. 병자호란으로 남편 소현세자와 함께 도르곤에 의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귀환했다. 민회빈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상소를 처음 올린 김홍욱은 국문을 받던 중 장살되었는데, 이는 민회빈의 무죄가 알려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인조에 의해 법살당했으나 당대에도 신독재 김집, 송시열, 김홍욱, 송준길 등은 그녀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뒤 여러 번 억울함을 신원하는 상소가 올려졌으나 거절되었고, 숙종 때 송시열이 다시 그녀의 억울함을 주장하여 신원을 청 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숙종 때 송시열, 김수항 등의 신원 상.. 더보기
의천, 대각국사 문종의 넷째 아들, 교장을 간행하고 천태종을 세우다. 의천, 대각국사 문종의 넷째 아들, 교장을 간행하고 천태종을 세우다. 의천(義天: 1055년 ~ 1101년 10월 5일)은 고려시대의 왕족 출신 승려이다. 자는 의천, 이름은 후(煦)이며, 호는 우세(祐世), 흔히 대각국사(大覺國師)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시호이다. 고려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이다. 대한불교천태종을 세운 한국 천태종의 중흥시조로서, 대한불교천태종에서 3대 종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송악 출신이다. 출생과 출가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과 그 왕비 인예왕후(仁睿王后)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11세되던 해에 부왕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는냐." 고 물었을 때, 그가 스스로 출가를 자원하였다 한다. 1065년.. 더보기
윤관, 여진족을 토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아 북방의 방어력을 높이다. 윤관 장군의 묘 윤관, 여진족을 토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아 북방의 방어력을 높이다. 윤관(尹瓘, 1040년 7월 12일 (음력 6월 1일) ~ 1111년 6월 15일 (음력 5월 8일)은 고려 중기의 문신·군인이다. 숙종, 예종 때 여진족 토벌에 출정하였다. 본관은 파평,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처음 시호는 문경(文敬)이었으나 뒤에 문숙으로 개시되었다.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尹莘達)의 4대손으로 아버지 윤집형(尹執衡)은 검교소부소감을 지냈으며 외가는 신라의 왕족이 었다. 여진족을 몰아내고 북진 정책을 완수한 공으로 영평(파평)백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으로 하였다. 숙종 때 2차 여진족 토벌 당시는 원수로 출정하였으나 실패, 강화회담을 하고 되돌아왔다. 이후 특수 부대 별무반..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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