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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김상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전론을 펴고,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다. 김상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전론을 펴고,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다. 김상헌(金尙憲, 1570년 ~ 1652년)은 조선 중·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병자, 정묘호란시 척화대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본관은 (신)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 조선후기 세도가의 직계선조로 그의 후손에서 13명의 재상과 수십 명의 판서, 참판이 배출되었고, 순조비, 헌종비, 철종비 등 왕비 3명과,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가 모두 그의 후손이었다. 생애 초반 3세 때 큰아버지인 김대효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소학(小學)》 공부에 힘썼으며 성혼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다.. 더보기
영릉 효종의 능 사회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하여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다. 영릉 효종의 능 사회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하여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다. 능호 : 영릉 위치 :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 지정번호 : 사적 제195호 조성시기 : 1673년(현종 14) 능의 구성 영릉은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과 비 인선왕후의 쌍릉이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언덕에 같이 있는 경우 대개는 봉분을 나란히 두는 쌍릉의 형식을 택하는데, 영릉은 특이하게도 왕릉과 왕비릉이 상하로 조영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놓을 경우 생기가 왕성한 정혈을 비켜가야 하기 때문에 좌우 쌍릉을 쓰지 않고 상하혈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를 동원상하릉이라고 하는데 동원상하릉 중에서는 영릉이 조선 최초이다. 왕.. 더보기
현종,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유일하게 외국(청)에서 출생하다. 현종,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유일하게 외국(청)에서 출생하다. 현종(顯宗, 1641년 3월 14일 (음력 2월 4일) ~ 1674년 9월 17일 (음력 8월 18일), 재위: 1659년 ~ 1674년)은 조선의 제18대 임금이다. 시호는 현종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이며 이후 존호가 더해져 정식 시호는 현종소휴연경돈덕수성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顯宗昭休衍慶敦德綏成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이다. 휘는 李棩(이연),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 자는 경직(景直). 효종의 장자로 어머니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이다. 비는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 명성왕후이다.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유일하게 외국(청)에서 출생한 왕이고 왕비 외의 후궁을 1명도 두지 않은 검소하고 소박한 조선의 왕이기도 하다.. 더보기
송시열, 주자학의 대가로 조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 받다. 송시열, 주자학의 대가로 조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 받다. 송시열(宋時烈, 160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2일) ~ 1689년 7월 19일(음력 6월 3일))은 조선의 문신·성리학자이다. 주자학의 대가이자 당색으로는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성뢰(聖賚), 성래(聖來),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교산노부(橋山老夫)·남간노수(南澗老叟)·화양동주(華陽洞主)·화양부자(華陽夫子),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의 왕자 시절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별칭은 대로(大老),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이다. 1633년(인조 10) 경릉 참봉으로 출사하여 대군사부, 진선, 장령, 찬선, 세자사부, 이조판서, 의정부좌의정.. 더보기
김자점, 산림 학자 세력으로 비정상적인 권력남용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다. 김자점, 산림 학자 세력으로 비정상적인 권력남용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다. 김자점(金自點, 1588년 ~ 1651년 12월 17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정치가, 군인, 성리학자이며 인조의 서녀 효명옹주의 시조부로 왕실의 인척이었다. 자(字)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본관은 경북 안동이다. 이력 그는 인조 반정에 참여하였고 귀인 조씨의 인척이었으며 친청파 정치인이었다. 음서제로 관직에 올라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이르렀으며 낙흥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인조 반정의 모의에 가담하였으며 1623년 3월 반정을 꾀해 군대를 모아 홍제원에서 이괄 등의 군사와 합류하였고 반정에 성공한 공로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특별 승진하고, 도원수가 되었으며,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관에 녹훈되고 낙흥군(洛.. 더보기
효종, 봉림대군, 북벌정책은 한창 떠오르는 세력이었던 산림 세력과 손을 잡기 위해 택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효종, 봉림대군, 북벌정책은 한창 떠오르는 세력이었던 산림 세력과 손을 잡기 위해 택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효종(孝宗, 1619년 7월 3일 (음력 5월 22일) ~ 1659년 6월 23일 (음력 5월 4일), 재위: 1649년 ~ 1659년)은 조선의 제17대 임금이다. 인조와 인렬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623년 인조 반정 후 왕자로 책봉되고 1626년 봉림대군의 작위를 받았다. 1635년 대군사부로 임명된 송시열, 윤선도, 송준길 등에게서 성리학을 수학하였으며, 1637년 정축하성 이후 소현세자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8년만에 귀국했다. 그 뒤 형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으면서 부왕 인조에 의해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7년부터는 부왕 인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시행하였고 1649.. 더보기
균역법, 군역세법 개혁, 양반층은 징수 대상에서 벗어나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 균역법, 군역세법 개혁, 양반층은 징수 대상에서 벗어나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 균역법 (均役法) 은 조선 후기 군역을 대신하는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인 군역세법 개혁이다. 호당 군포를 부과한 것이 아니라, 토지 1결당 군포를 부과하여 지주들의 납세를 촉진시키려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5군영의 성립으로 대부분의 양인 장정은 1년에 2필씩 군포를 부담하는 납포군이 되었다. 하지만 군포 징수에 따른 폐단으로 가난한 농민층에 대부분의 부담이 전가되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17세기 중엽 인조, 효종 때부터 양역변통론이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발전하여 균역법이 시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균역법이 시행된 것은 영조 대의 일이다. 1750년(영조 26년)에 와서 이 제도의 시행을 담당하는 관청인 균역절목.. 더보기
대리청정, 임금의 정치를 대신 수행한 조선의 왕세자 대리청정, 임금의 정치를 대신 수행한 조선의 왕세자 대리청정(代理聽政)은 조선 시대에 임금의 재가(허락)를 받아 임금의 정치 등 여러 일을 대신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섭정). 보통 대리청정은 왕세자 및 왕세손이 하였으며, 가끔 왕세제가 할 때도 있었다. 대리청정할 때의 왕세자 및 왕세손, 왕세제를 소조(小朝)라 했고, 그 당시의 국왕을 대조(大朝)라 부른다. 조선 왕조의 대리청정 태종 : 부왕 태조 때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는 반발을 무마하는 시간을 벌고 왕위 찬탈의 오명을 피하기 위해 형 정종을 세자 책 봉되게끔 했다가 다시 실권 없는 보위에 올려 정종 대신에 왕세제가 아닌 왕세자로서 1398년부터 1400년까지 대리청정하였다. 당시 맏형이자 태조의 적장자였던 진안대군이 개국한지 불과 1년 후에 훙서한..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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