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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실리외교를 펼친 광해군 현대에 와서 재조명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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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실리외교를 펼친 광해군 현대에 와서 재조명되다.

 

 

 

광해군(光海君, 1575년 6월 4일 (음력 4월 26일) ~ 1641년 8월 7일 (음력 7월 1일))

조선의 제15대 임금이다. 성은 이(李), 휘는 혼(琿),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었고,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으는 데에도 힘썼다.

임진왜란 동안 세자의 몸으로 부왕을 돕고 전쟁 승리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부왕의 인정은커녕 견제와 냉대를 당해야 했다.

 

임진왜란 이후 우여곡절 끝에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듯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며, 후금과의 전쟁 위기 상황에서 실리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위 옹립에 공이 컸던 대북파의 반발로 당쟁에 휘말리고 말았으며,

이후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이후 줄곧 인목왕후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했다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이유로 패륜자로 일컬어져 왔으나, 현대에 들어와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애 초기

 

1575년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광해군에 봉해졌다. 어려서 생모 공빈 김씨를

여의고 부왕의 냉대 속에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김희철마저도 임진왜란 중에

 전사하면서 그가 기댈 곳은 없었다.

선조에게 적자가 없는 데다, 서장남인 임해군이 포악하고 인망이 없어

서차남이었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선조가 아들들을 불러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다른 왕자들은 각기 다른 대답을 하였지만, 광해군은 소금이라 대답하여

세자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세자 건저의 문제

당시 선조는 정비 의인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서자 중에서

왕세자를 선택해야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질로 따지자면 광해군이 유력했으나 선조는 자신이 총애하는 후궁 인빈 김씨의

아들인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더군다나 선조는 광해군이 적자가 아님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왕세자 책봉을 계속 미루었다.

그러나 선조의 나이가 어느덧 40살에 이르자 더는 왕세자 책봉을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좌의정 정철은 건저(建儲)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동인의 영수인 영의정 이산해와 우의정 유성룡 등과 함께 광해군의 책봉 문제로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경연에서 “나라가 어려울 때 빠른 시일 내에

세자를 책봉하는 것이 현명하다.”라며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라는 건의를 했다.

선조는 공빈 김씨가 죽자 인빈 김씨를 총애하여 인빈의 아들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세자 건저 문제에서 동인 이산해의 계략에 넘어간 정철 등의 견제로 실패하였다.

정철은 광해군을 왕세자로 추천했으나, 신성군을 모함한다는 이유로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을 당하고 유배를 가게 되고, 동인은 이 일을 처리하게 되는데,

많은 서인을 외직으로 쫓아버리면서 선조는 유성룡을 좌의정으로 올리고

서인을 멀리하며 동인들을 가까이 두었다.

이 일의 처리 문제 때문에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동인은 정여립의 모반으로 일어난 기축옥사 때 정철에게 원한을 품어,

건저의 문제를 통해 서인에 대한 보복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후 부왕의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의 양자가 되어 세자로서의 위치를 표면상 굳히게 되었다.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왕세자 책봉 문제가 거론되지 못하였으나,

신성군이 피난길에 죽고 분조해야 할 상황에 부닥치자 선조는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은 성격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다는 이유로 왕세자 책봉에서 제외되었다.

광해군은 전쟁 중에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된 뒤 선조가 피난 가고 없는 궁을

지키면서 전란 수습을 했다.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는 한편,

민심을 위무하고 군량미를 모아 민중들의 신망과 지지를 받기도 했다.

또한, 부왕의 정비인 의인왕후의 양자가 되어 세자로서의 위치를 표면상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부왕 선조는 그런 세자 광해군을 오히려 경계하며

심하게 견제하였다.

 

왕위계승

 

그 후 1606년 선조의 계비가 된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적자)을 낳자 광해군을

미워하던 부왕 선조는 다시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고,

소북파의 유영경 등도 적통론을 내세워 영창대군 옹립계획을 세운 선조를 지지하였다.

 

특히나 선조 자신이 서얼로서 방계승통을 했다는 콤플렉스까지 겹치면서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그러나 1608년 지병이 악화된 선조는 영창대군이 어린 상태에서 광해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교서를 내린 후 약밥을 먹다가 갑자기 체하여 승하하였다.

이때 교서는 선조가 내린 것이 아니라 인목왕후가 현실성이 없다 판단하여

광해군에게 왕위를 양보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1608년 음력 2월 2일,

광해군은 3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유영경은 사류사회(士類社會)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유영경의 척신 정권에 대한 의도는 사류사회의 거부감만 가중시켜 유영경은 잇단 탄핵으로

주살되고, 사후에도 그 죄를 물어야 한다는 항의가 빗발치기도 했다.

 

유영경의 세자 교체 기도에 대해 적극 반대하고 나선 것은 그에 의해 축출되었던

북인의 다른 계열인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이고, 이들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정통을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어 대북(大北)이라 하였다.

이후 소북파는 대북파의 견제를 끊임없이 받으며 조금씩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즉위 초기

 

즉위한 광해군은 바로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존하였다.

유영경의 세자 교체 기도에 대해 적극 반대하고 나섰던 대북파의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광해군을 정통으로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었다.

 

즉위 초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알고 억제하려 하였다. 남인인 영의정 이원익을

포함하여 북인에게 밀린 남인계 인사들과 서인계 인사들을 일부 등용하고,

소북파를 대북파 못지않게 대우하는 등 초기에는 당쟁을 수습하려고 노력했으나

대북파의 반발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산림 숭용 정책을 추진하고 재야의 선비들을 채용하려 하였으나 곽재우, 정인홍

모두 고사하거나 취임 후 사직 상소를 한 후 내려가 실패하였다.

그러나 정인홍은 뒤에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관직에 올라 북인 정권의 막후 실력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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