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 북학파의 선구자, 지구자전설을 주장하다.
홍대용(洪大容, 1731년 5월 12일(음력 4월 7일) ~ 1783년 11월 17일(음력 10월 23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이자
과학 사상가이다.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과 홍지(弘之)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청나라의 문인 엄성이 그린 홍대용
북학파(北學派)의 학자인 박지원, 박제가 등과 우정을 쌓았으며, 학풍은 유학보다도 군국과 경제장려에 치중하였다.
생애 (초기)
북학파의 선구자로서 일찍이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에게 배워 당대의 국학(國學)으로 인정되던 주자학이 담헌의
학문적 기초를 이루었다.
북경 방문
1765년(조선 영조 41년) 35세 때 숙부인 홍억(洪檍)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軍官)으로 수행, 3개월여를 북경
에 묵으면서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을 만나 담론하며 경의(經義), 성리(性理), 역사, 풍속 등에 대하
여 토론했다. 한편 천문학·지리학·역사 등에 관한 지식을 쌓고 서양 문물을 배우고 돌아왔다.
또 천주당(天主堂)에서 서양 문물을 견학, 학습하고 독일 사람으로 청나라의 흠천감정(欽天監正)을 하는 할레르슈타인
(劉松齡)과 흠천감 부감(副監) 고가이슬(鮑友管) 등을 만나 면담했으며, 청나라 관상대(觀象臺)를 여러 번 방문, 견학하
여 천문지식을 습득해 오기도 했다. 홍대용의 이와 같은 북경 방문은 당시의 여러 북학파 학자 중에서도 제일 처음의 일
로서 실학의 도입에서 그 선구적 업적이 크다.
귀국 후
귀국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론을 기록한 유포문답과 과학 사상을 담은 의산문답을 지었다. 지구의 자전설과 경제 정
책의 개혁,과거 제도를 폐지하여 공거제를 통한 인재 등용 등 혁신적인 개혁 사상을 제창하였다. 또한 박지원, 박제가
등의 실학자들과 교유를 계속하면서 정치·경제에 관한 학문을 연구하였다.
1774년영조 50 44세 때 귀국 후 수차 과거에 실패하고 음서 제도음보로 선공감 감역이 되고 그 뒤 세손익위사의 사직,
사헌부감찰·태인현감 등을 거쳐 1780년 영주군수 등을 지내면서 자기의 학설을 사회에 구현해 보려는 노력을 하였으나
시대 환경에 억눌려 별 성과 없이 사망했다.
사상
북학파의 선구자로, 당시 조선에는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개념이 없었으나, 처음으로 지구(地球)의 자전설 (自轉說)을
대중에게 설파하였다. 토지 등을 균등하게 분할하는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를 토대로 하는 경제정책의 개혁
을 주장했으며, 특히 실사구시 정신에 따라 신분 제도 개혁을 위해 과거제를 없애고 공거제(貢擧制)에 의한 인재를 고
루 등용하며, 신분 등에 관계없이 8세 이상의 모든 아동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과감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홍대용은 그의 저서 《의산문답》에서 보여 주듯이 인류의 기원, 계급과 국가의 형성, 법률·제도 등에서부터 시작하여
“놀고먹는 귀족 계급이 나라와 백성을 좀먹는다(所謂遊民倖位耗國病民 : 《계방일기》.”라며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양반계급에 대한 공격을 했는가 하면, 천문·율력(律歷)·산수 등 과학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이론을
전개했다.
천문 분야에서도 지구지전설을 주장하였는데, 17세기에 중국이 서양에서 이를 전해받았을 때 지지를 받지 못한 것과
대조된다.
저서
《담헌서》《담헌총》《사서문의》《의산문답》《임하경륜》《건정필담》《주해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