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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암행어사의 전형으로 알려져 별견어사로 4번 파견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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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암행어사의 전형으로 알려져 별견어사로 4번 파견되다.

 

 

박문수(朴文秀, 1691년 ~ 1756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 정치가(政治家)이다. 자(字)는 성보(成甫)이고

호(號)는 기은(耆隱)이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아버지는 박항한(朴恒漢)이고 큰

아버지는 박태한(朴泰漢)이다.

 

 

                                                                                                             박문수 초상


 

생애


1723년(경종 3)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다. 이듬해 설서(設書)·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영조 즉위년)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削職)되었다.

 

1727년에는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사서에 등용되어 영남안집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했고,

이듬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 도순문사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고,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으로 영성군(靈成君)에 봉해졌다.

 

1730년 참찬관에 이어 호서 어사로 나가 굶주린 백성의 구제에 힘썼으며, 1734년에 진주사 부사(副使)로 청나라

에 다녀와 앞서 안동서원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豊德) 부사로 좌천되었다.

 

1741년(영조 17) 어영대장을 거쳐 함경도 진휼사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 와서 기민(飢民)을 구제하

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다음해 병조 판서, 1743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이듬해 황해도 수군

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749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의 폐해를 논하다 충주 목사로 다시 좌천되었다.

 

그 후 영남 균세사(均稅使)를 거쳐 판의금부사·세손사부를 지내고 1752년 왕세손인 의소세손이 죽자 약방제조로

책임을 추궁 받아 제주도에 안치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우참찬에 올랐다.


평가


관찰사 등 지방관으로서 군정과 세정에 밝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끝내 영의정에 오르지는 못했다.


암행어사로서의 활동 여부


암행어사의 전형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별견어사로만 4번 파견됐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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