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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추사체, 개화사상가이며 고증학에 뜻을 두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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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추사체, 개화사상가이며 고증학에 뜻을 두다.(1)

 

김정희(金正喜, 정조 10년(1786년) 6월 3일(1786년 6월 28일) ~ 철종 7년(1856년) 10월 10일(1856년 11월 7일)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이다. 본관경주이고, 자는 원춘(元春),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등이다. 노론 북학파 실학자이면서 화가, 서예가였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잘 그렸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그뒤 삼사의 언관을 거쳐 효명세자의 사부로써 보도하였으며, 1823년 규장각대교가 되었다가 충청우도암행어사나갔다. 그뒤 의정부의 검상(檢詳), 1836년(헌종 2년)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1830년 생부 김노경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났으나 헌종즉위 초, 김정희 자신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 1840년(헌종 6)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석방되었다. 1851년(철종 2)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의 예론(禮論)으로 예송 논쟁이 벌어지자 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1853년 풀려났다. 추사와 완당이라는 호를 많이 사용했으나 그밖에 100여개 넘는 별호를 사용했다. 당색으로는 노론으로 외척이었지만 벽파나 탕평당에 들지 않고 북학파가 되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친족이었고, 양어머니 남양홍씨를 통해 남연이종사촌간이 된다. 실학자 박제가의 문인으로 연암 박지원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흥선대원군박규수, 효명세자그의 문인들이었다.

 

출생과 가계

충청도 예산현(현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병조판서를 지낸 김노경(金魯敬)과 유준주(兪駿柱)의 딸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노영(魯永)의 양자가 되어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그의 가문은 멀기는 했으나 왕실의 이중 외척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세력가였다. 당색으로는 노론으로 그의 집안은 서인 중진인 김홍욱의 후손이었다. 노론의 당원이 된 뒤에는 고조부 김흥경영조 때의 재상이었고, 증조부 김한신영조의 서녀 화순옹주의 부마가 되어 월성위가 되었다. 또한 증조부 김한신과 10촌 형제간인 김한구의 딸은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였다. 그의 집안은 노론 외척 계열이었지만 고조부 김흥경과 증조부 김한신은 당파에 초연했고, 추사 역시 벽파나 탕평당에 들지 않고 북학파에 가담하였다.

7세 때 그는 입춘대길이라 쓴 글을 문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채제공이 보고는 김정희에게 장차 명필이 되겠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서얼 출신으로 시, 서, 화에 모두 능했던 박제가에게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박제가를 통해 북학파 박지원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영조의 딸 화순옹주가 출가한 월성위 집안에서 태어난 김정희의 집안에는 대대로 명필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기계 유씨가 임신한 지 2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이 있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다.


청소년기

그러다가 큰아버지 김노영이 귀양 가고, 둘째 큰아버지 김노성, 할머니, 할아버지 등이 죽게 되었다. 그러자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집안의 뜻에 따라 김노영의 양자로 입적된 뒤 15세의 나이로 동갑인 한산 이씨와 혼인한다. 결혼하던 그해 정조가 승하하고(1800년), 그의 증대고모뻘인 김대비(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그 연고로 친부인 김노경은 종3품까지 벼슬이 오른다.

양어머니 남양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간이 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후에 흥선대원군이 김정희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게 된다. 생모가 34세로 세상을 떠나자, 비탄과 허무감에 고향 예산으로 내려가 한때 불교에 심취하기도 한다. 스무살 되던 해(1805년) 대왕대비가 승하하고, 그 다음달에는 부인 한산 이씨가 죽었다. 이 무렵 스승 박제가가 유배에서 풀려났다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양어머니도 얼마 뒤 죽었다. 양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른 뒤 한 살 아래인 규수와 재혼한다. 이듬해인 1809년(순조 9)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학문과 사상 형성

16세 때 북학파의 대가이자 3차례 이상 청을 오가며 학문의 폭을 넓히고 있었던 박제가(朴齊家)의 제자가 되면서 그로부터 북학파 사상을 배우고 연암 박지원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청나라고증학(考證學)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809년(순조 9) 24세 때 동지사(冬至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일행이 서울을 떠날 때 그도 부사(副使)인 부친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의 직책으로 연행(燕行) 길에 올랐다.

당시 연경의 학자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 이후 학문 활동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옹방강은 일찍이 〈사고전서 四庫全書〉의 편찬에 관여했으며,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문장·금석·서화·시에 능한 학계의 원로였다. 당시 청의 학풍은 한대의 학문을 숭상하고 송나라, 명나라성리학을 관념적이라며 배척하는 것이었는데, 옹방강은 한나라송나라 학문의 절충을 주장하고 있었다. 청나라 중기의 경학의 대가였던 완원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비롯한 고증학의 학문적 체계수립에 영향을 주었다. 연암 박지원북학사상과 청나라 고증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는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생각은 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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