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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최초의 여왕,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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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사 9층 목탑 복원도

 

 

선덕여왕, 최초의 여왕,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우다.

 

 

선덕여왕(善德女王, ? ~ 647년 2월 17일 (음력 1월 8일)) 또는 선덕왕(善德王)신라의 제27대 군주(재위: 632년~647년)이며,

한국사에서 최초의 여왕으로 알려져 있다.

 

(金), 덕만(德曼)이다. 진평왕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이며 태종무열왕의 6촌 누나이자 큰이모이다.

 

632년부터 64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632년 을제김용춘이 잠시 순차적으로 대리청정하여 국정을 담당했고 같은 해 632년

647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생애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장녀, 《삼국유사》에는 형제자매 서열에 관한 기록 없이 진평왕의 딸로 기록하였다.

 

진평왕이 아들 없이 죽자, 화백회의진평왕의 왕녀인 덕만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겸하여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존

호를 올렸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은 「김씨 성골의 남자가 다하였으므로 여왕이 왕으로 선 것이다(金氏聖骨男盡故女王立王)」고

히고 있다.

 

또한 덕만이 즉위하기 1년 전인 건복 48년(631년)에 칠숙석품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되었다.

즉위한 해인 건복 49년(632년)에 을제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케 하고,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홀아비, 홀어미, 고아, 독거노인

등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게 하였으며,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건복 50년(633년) 정월에는 스스로 신궁에 제사를 올리고 여러 주 · 군의 조세를 1년간 감해 주었다.

또한 8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공했다.

 

여왕은 즉위 3년째인 건복 51년(634년)부터 인평(仁平)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해에 분황사(芬皇寺)가 완공

되었다.

 

인평 2년(635년) 겨울에는 이찬 수품(水品)과 용수(龍樹)를 시켜 각지의 민심을 위로하게 하였다.

또한 당으로부터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봉해지기도 했다.

 

인평 3년(636년) 정월에는 수품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에 병이 나자 이를 기양하기 위해 황룡사(皇龍寺)에서 큰 법회를 열

었다(《삼국사기》).

 

같은 해, 자장법사가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으로 들어갔다.

인평 3년(636년) 5월에 백제 장군 우소가 여근곡에 쳐들어오자 알천, 필탄 두 장군을 보내 이를 무찔렀다.

 

인평 5년(638년) 10월에는 고구려칠중성을 공격해 왔고, 다시 대장군 알천을 파견해 이를 격퇴하고 불안한 민심을 달랬다.

인평 6년(639년), 북부 국경을 방비하기 위해 하슬라(荷瑟羅)를 북소경(北小京)으로 삼고 사찬 진주(眞珠)를 보내 지키게 하였

다.

 

인평 7년(640년)에는 귀족 자제들을 유학생으로서 당의 국자감에 입학하게 하고, 인평 9년(642년) 정월에 다시 당에 조공하였

다.

 

7월에 백제의 의자왕이 이끄는 군사들이 신라의 서쪽 40여 개 성을 함락시키고, 여기에 고구려까지 당과의 외교 거점이었던

항성을 공격해오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11월에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시켰고, 이찬 품석(品釋) 등이 죽었다.

왕은 패배를 만회하고자 자신의 조카이자 김품석의 장인인 이찬 김춘추고구려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보장왕신라를 구원해주기는커녕 김춘추를 감금하였다.

이를 안 여왕이 김유신을 보내 한강 북부까지 진격하니 보장왕김춘추를 풀어주었다.

 

인평 10년(643년) 정월에도 당에 토산품을 바쳤다.

9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으나 당 태종은 이를 거절하였고, 인평 11년(644년) 정월에 신라는 다시 당에 조공을 바

쳤다.

 

이에 당 태종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공격을 멈추라고 종용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일전에 고구려수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그 틈을 타서 신라가 빼앗아간 우리의 영토 500리를 돌려주기

에는 싸움을 멈출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9월에 왕은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백제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인평 12년(645년) 정월에도 당에 조공을 바쳤다. 백제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자장법사의 건의로 여왕은 3월에 황룡사탑을 세웠다.

5월 당 태종고구려를 침략하자 군사 3만을 파견하여 이를 도왔다.

 

그러나 그 사이에 백제에게 일곱 성을 빼앗겼다. 11월에는 비담상대등으로 삼았다.

재위 마지막 해인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염종(廉宗)과 함께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

 

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유신을 파견하여 비담을 상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반란 와중인 정월 8일에 여왕은 승하하였다. 시호를 ‘선덕’이라 하였고, 일전에 예언한 것처럼 낭산에 장사지냈다.

 

평가

 

선덕여왕은 재위 초반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며, 첨성

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그녀가 백성들을 얼마나 인자하게 아끼고 사랑했는지는 지귀(志鬼)의 설화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선덕여왕을 흠모하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지귀는 그 중에서도 특히 흠모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행차할 때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선덕여왕이 이를 보고 그

의 가슴 위에 자신의 팔찌를 놓고 떠났다.

 

지귀가 잠이 깨어 이를 알고는 마음에서 불이 나고 감동하여 영묘사(靈廟寺)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또한 불교 또한 널리 장려하여 분황사, 영묘사 등 절을 많이 건립하고 불경을 연구시켜 불교의 일대 부흥을 가져왔다.

 

특히 선덕여왕은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를 모두 9층으로 한 뜻은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 이

름을 새겨넣은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의 사론은 이와 사뭇 다르다.

 

그는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

라 하겠다.”

 

라며 왕의 치세를 혹평하였다.

 

이덕일은 이를 유교적 가치를 갖고 있던 김부식차별적 선입견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선덕여왕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더 있다.

 

예를 들어 안정복동사강목에서

 

" 왕이 황룡사에 탑을 구축하였는데, 참으로 많은 돈을 썼다. 이러한대도 나라가 망하지 않았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라고 말하였다.

 

또한 김춘추에게 굴욕적인 외교 (아들 김법민을 볼모로 보내는 등)를 한 것을 조종했다는 점이나 백제 무왕이나 의자

이 침공을 하여 1백여개의 성이 함락되었는데도 잘 막지 못하였다는 점이 비판을 받기도 한다.

 

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삼국유사선덕여왕조에는 선덕여왕이 미리 깨달은 일 세가지(지기삼사(知幾三事))가 수록되어 있다.

 

당 태종의 모란

 

즉위년인 632년, 당 태종은 빨강, 자주, 하얀색의 모란 그림과 그 씨앗을 선물로 보냈다.

왕은 이를 보고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씨앗을 심어보니 과연 그랬다.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

 

라고 답했다.

 

일연은 이 고사를 소개한 뒤, 당 태종신라에 세 여왕(선덕, 진덕, 진성)이 있을 것으로 짐작한 점도 함께 칭찬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일이 진평왕 말년에 벌어진 일로 묘사되어 있다.

여근곡의 백제


왕은 즉위 4년인 635년,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겨울날,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가 사나흘 동안 운 일이 있었다.

 

이에 왕은 각간(閼川), 필탄(弼呑)에게 병사 2천을 주어 서라벌 서쪽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을 습격하게 하

였다.

 

여근곡에는 백제 장수 우소(亏召)가 매복해 있었는데, 알천과 필탄은 이를 쳐서 모두 죽였다.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개구리가 심히 우는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요, 옥문이란 여자의 음부를 가리킨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백색

인데, 이는 서쪽을 뜻한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쉽게 잡을 수 있었다."

 

라고 답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옥문지에서 개구리가 운 때가 즉위 5년인 636년 5월로 기록하고 있다.

 

왕의 승하와 도리천

 

어느날 왕이 신하들을 불러

 

 "내가 죽으면 도리천(忉利天)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이는 낭산(狼山) 남쪽에 있다."

 

고 하였다.

 

이후 왕이 죽은 뒤 신하들은 왕을 낭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이후 문무왕 대에 이르러 선덕여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이는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는 내용이 실현된 것이었다.

 

일화

 

삼국유사 탑상 편에 따르면, 자장법사가 왕에게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을 진언한 때는 643년 이었다.

(삼국사기에서는 645년) 이에 왕은 김용춘을 시켜 백제에서 기술자 2백 명을 맞아들여 탑을 지었다.

 

탑의 기둥을 세울 때, 백제 장인 아비지는 백제 멸망의 꿈을 꾸어 일을 멈추었다.

그때 노승 한 명, 장사 한 명이 나타나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

 

이에 아비지는 마음을 고쳐먹고 탑을 완성했다.


삼국유사 신주 편에 따르면, 하루는 여왕이 병이 깊어 홍륜사의 법척법사를 불러 치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에 밀본법사를 불러 침실 밖에서 경을 읽게 하였다.

 

경을 다 읽고 밀본은 막대기를 들어 침실 안으로 던졌다.

이에 늙은 여우 한 마리와 법척이 찔려 뜰 아래로 쓰러졌다. 이에 왕의 병이 당장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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