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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 중앙정보부의 조작에 의해 유신반대 성향이 있는 인물들에게 사형이 집행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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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

중앙정보부의 조작에 의해 유신반대 성향이 있는 인물들에게 사형이 집행되다.

 

 

인민혁명당 사건(人民革命黨 事件, 영어: People's Revolutionary Party Incident) 또는 인혁당 사건(人革黨 事件)은 중앙정보

부의 조작에 의해 유신반대 성향이 있는 도예종 등의 인물들이 기소되어 대법원의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사건

이다.

 

한국방송 《미디어 비평》의 '오늘의 역사'에서는 인혁당 사건이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중앙정보부의 조작으로 밝혀졌음을 보도했다.

 

인권탄압의 사례

 

1964년의 제1차 사건에서는 반공법위반으로 실형이 선고 되었고 , 1974년의 제2차 사건에서는 국가보안법·대통령 긴급조치

4호 위반 등에 따라 기소되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이 사형을 선고해,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인혁당 사건은 국가가 법으로써 죄없는 사람들을 죽인 사법살인 사건이자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일어난 인권 탄압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재심소

 

2005년 12월 27일 재판부는 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소를 받아들였다.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는 피고인 8명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같은 해 8월 21일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의 소에서 서울지방법원은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고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의 항변을 배척하면서 시국사건상 최대의 배상액수 637억여 원(원금 245여억 원+이자 392여억 원)를 지

급하라고 판결했다.

 

제1차 인혁당 사건

 

1964년 8월 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 부장은 도예종, 양춘우 등과 언론인, 학생 41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이를 통상 '제1차 인혁당 사건'이라고 부른다.

 

중앙정보부에 따르면

 

"이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로동당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반(反)정부 조직인 인민혁명당(인혁당)을 결성하여

각계 인사를 모으면서 국가 사변(事變)을 기획했다"

 

라고 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의 주장은 억지스러운 것이었다.

검찰이 기소한 인원수는 13명에 불과했고, 1심에서는 도예종과 양춘우에게 2~3년의 실형이, 그외 11명에게는 무죄가 선고되

었다.

 

그러나, 2심에서 도예종, 양춘우, 박현채 등 6명이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고, 그 외 5명은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한편, 사건 관련자 김배영은 1962년 10월 일본으로 밀항하였다가 일본 경시청의 수배를 받자, 1964년 11월 재일본조선인총연

합회를 통하여 월북하였다.

 

그는 이후 1967년 10월,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1971년에 체포되어 사형이 집행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김배영의 사형이 집행된 후 3년이 지난 제2차 사건에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자금은 월북한 김배영으로부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제2차 인혁당 사건

1972년 12월의 유신 체제 발족은 박정희 정부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불러 일으켰고, 1973년 10월부터 시위 등을 통한 박정희

정부의 유신 체제에 대한 반대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1974년 4월 3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은

 

'민청학련이라는 지하조직이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아래 사회 각계각에 침투해 인민혁명을 기도한다'

 

는 요지의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제4호를 공포했다.

 

4월 25일,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 사건 수사상황발표에서 민청학련을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학생을 주축으로 한, 정부를 전

복하려는 불순 반정부세력'으로 규정했다.

 

이와 관련하여 긴급조치 제4호 및 국가보안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1천 24명이 영장 없이 체포되고, 그 중 253명이 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송치되었다.

 

5월 27일,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민청학련 사건 추가발표에서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있으며,

들이 인민혁명당을 재건해 민청학련의 국가 전복 활동을 지휘한 것으로 발표했다.

 

소위 인혁당 재건위(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이다.

 

7월 11일, 민청학련(1심판부), 인혁당 재건위(2심판부), 일본인(3심판부)으로 분리하여 재판을 진행한 비상보통군법회의 재

부는 7월 8일 군 검찰부가 구형한 그대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21명 중 서도원, 도예종 등 8명에게는 사형, 김한덕

7명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 피고인 6명에게는 징역 20년을 선고하였다.

 

7월 13일에는 7월 9일 구형과 같이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32명 중 이철, 유인태 등 7명에 사형, 7명에 무기징역,

12명에 징역20년, 6명에 징역 15년이 선고됐다. 2명의 일본인에게도 징역20년이 선고됐다.

 

다만,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대부분 1975년 2월 15일 대통령특별조치에 의한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상고가 기각되어 사건 관련자 23명 중 서도원 등 8명에게는

사형, 김한덕 등 7명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 피고인에게는 징역 15~20년의 중형이 확정되었다.

 

1975년 4월 9일 새벽, 사형 선고를 받은 8명에 대한 사형이 판결이 확정된 후 불과 18시간 만에 집행되었다.

 

사건 당시의 국내외 반응과 박정희정권의 대응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국외의 반향은 컸다.

 

특히, 뉴욕타임스는 1974년 6월 8일에 주일 미국대사를 역임했던 라이샤워의 기고 '비참한 길을 걷는 한국'을 싣고

 

"박정희의 근대민주주의는 조지 오웰의 1인 전제정치이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삭감해야 한다"

 

라고 보도했다.

 

이어 7월 22일에는 '한국에 있어서의 탄압'이란 사설을 게재,

 

 "북한과 구별하기 힘든 독재가 계속된다면 주한미군이 장기주둔할 수 없다. 워싱턴과 도쿄가 공동으로 한국에

대한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워싱턴포스트와 더 타임스도 유신정권의 독재와 탄압 실태를 상세히 보도했다.

 

이러한 내용은 검열로 인해 국내 언론을 통해서는 소개되지는 못했지만, 유인물 등을 통해 대학과 개신교·가톨릭교회를 중

심으로 퍼져나갔다.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국내외적 비판에 형법 제104조의2에 국가모독죄(1975년 3월 25일 제정, 1988년 12월 31일 폐지)를 신

설해 전체주의로써 대응하였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고문을 당했으며, 목요기도회 등 신원운동을 펼친 개신교 성직자 조지 오글 목사는 1974년 12월에,

인혁당 구명운동을 펼쳤던 가톨릭 성직자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1975년 4월 30일에 각각 강제 추방을 당했다.

 

박정희 정권은 주검까지 빼앗았다.

 

경찰은 사형집행 다음날인 1975년 4월 10일, 연미사를 올리기 위해 함세웅 신부의 응암동성당으로 향하던 송상진의 주검을

탈취하려고 녹번동 삼거리에서 4시간 20분 동안 승강이를 벌이다, 크레인까지 동원해 영구차를 강제로 끌어가 일방적으로

화장 처리했다.

 

이를 막으려던 문정현 신부는 영구차 바퀴에 깔려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사건 이후의 평가

 

이 사건의 판결은 현재까지도 대내외적으로 "사법살인"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으며,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

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는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김형욱은 이 사건을 회고록 《혁명과 우상》에서

 

"박정희와 이후락의 지령을 받은 신직수 그리고 그의 심복 이용택이 10년 전에 문제 되었다가 증거가 없어서 석

방한 사람들을 다시 정부 전복 음모 혐의로 잡아넣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1995년 4월 25일 MBC가 사법제도 1백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판사 315명에게 실시한

《근대 사법제도 100주년 기념 설문조사》에서 인혁당 사건 재판이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

이었다고 응답함으로 이 사건이 정상적이지 못했음을 법조인들도 인정했다.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고 발표하였다.

 

사건 관련자

 

1975년 4월 9일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이 집행된 여덟 명은 다음과 같다.

 

     

 

그 외의 형량은 다음과 같다.

 

          

 

975년 4월 8일 이들에게 사형을 판결한 대법원 판사들은 다음과 같다.

 

 

        

 

이 중에서 이일규 판사만 소수의견을 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검찰총장은 아래와 같다.


신직수(申稙秀) 중앙정보부장

김치열 검찰총장

 

결과

 

장석구 : 1975년 10월 15일 서대문구치소에서 옥사.

전재권 : 1982년 3월 2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이후 복역 후유증으로 1986년 5월 7일 병사.

유진곤 : 1982년 3월 2일 징역 20년 감형, 1982년 12월 2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이후 투병생활 중 복역 후유증으로 1988년 5월 5일 병사.

이재형 : 1982년 3월 2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이후 복역 후유증으로 2004년 12월 21일 병사.

조만호 : 1982년 3월 2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이후 1996년 1월 26일 사망.

이태환 : 1982년 3월 2일 징역 20년으로 감형, 1982년 12월 2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정만진 : 1982년 3월 2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이성재 : 1982년 3월 2일 징역 20년으로 감형, 1982년 12월 2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전창일 : 1982년 3월 2일 징역 20년으로 감형, 1982년 12월 2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김한덕 : 1982년 3월 2일 징역 20년으로 감형, 1982년 12월 2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라경일 : 1982년 3월 2일 징역 20년으로 감형, 1982년 12월 2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강창덕 : 1982년 3월 2일 징역 20년으로 감형, 1982년 12월 2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김종대 : 1982년 3월 2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이창복 : 1982년 3월 2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황현승 : 1982년 3월 2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임구호 : 1982년 3월 2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이현세 : 1979년 6월 28일 만기출감.

 

진상 규명과 그 이후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중앙정보부 조작 사건이라고 발표하다.

2004년 11월 2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과거사위: 위원장 오충일)가 인혁당 사건의 진상 규명

                        조사를 개시하다.

2005년 12월 7일: 국가정보원 과거사위가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다.

2005년 12월 27일: 재판부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 소를 받아들였다.

2006년 12월 18일: 검찰이 이례적으로 구형없는 논고를 하다.

2007년 1월 23일: 서울 중앙지법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 8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다.

2007년 8월 21일: 인혁당사건 희생자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의 소에서 서울지방법원은 국가가 총 637억

                        여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리다.

2010년 1월 28일: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어 10개월간 복역했던 일본인 다치카와 마사키(太刀川正樹, 당시 28세)에 대한 재심

                        판결에서 무죄가 선고되다.

1차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도 재심이 청구되다

2013년 11월 28일:1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다.

 

보수 세력의 반응 -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시절 반응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2004년 8월 29일, 인혁당사건 관련 사과요구에 대해서 '(사형판결은) 법적으로 결론난

사항들'이라서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연찬회에서 작심한 듯 40분 가량의 시간을 할애해, 당 안팎의 과거사관련 논란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박 대표는 우선 사과 문제에 대해

 

"과거의 잘못을 사과할 만큼 충분히 사과했다"

 

라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사과요구에 대해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 헐뜯기"

 

라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는 유신시대도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인권탄압과 조작 의혹이 제기된 인혁당 사건 등에 대해

 

"법적으로 전부 결론난 사항들"

 

이라고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박 대표는 또 유신시대에 대한 평가는 "역사학자와 국민의 몫"이라고 주장했다.

 

     - "딸의 눈에 흐려진 '과거청산"  한겨레신문. 2004-08-30


 

2005년 12월 8일에는 국가정보원의 인혁당 관련 발표에 대해 가치가 없고 모함이며 진실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혁당사건이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나온 날에는 입장표명을 하지 않았다.


*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에서 인혁당, 민청학련 사건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개입, 주도했다고 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에서 발표하는 내용들은 한마디로 가치가 없고 모함이다.

 

첫 번째 김형욱 사건도 박 전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한 증거가 없다고 했다가 살해를 지시했다고 둔갑했다.

두 번째 정수장학회도 제대로 된 서류 있는데 진실위에서 날짜 위조하면서 강탈했다고 했다.

 

인혁당 문제도 증거는 없지만 정황이 이렇다는 식이다.

국정원 진실위 주장은 정당성이 없다.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 우리 역사를 왜곡해 함부로 발표하는 것 자체가 과거사가 될 것이다.

돈 들여 과거사위원회 만들었는데 왜 법적 근거도 없이 별도로 (국정원이) 따로 하느냐."

 

- "단독인터뷰: 박근혜 '국정원 과거사 규명은 가치없는 모함' 강력비난"  국민일보. 2005-12-08


 

또, 2012년 9월 10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다음날 국회 본회의에 출석하면서 기자들 앞에서는

'인혁당 사건에는 두가지 판결이 존재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반복했다.


"인혁당 사건 유족들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법원의 판결이 두 가지로 나왔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또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하지 않겠냐고 답한 적이 있다"

 

고 말했다.

"같은 법원에서 상반된 판결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에도 여러 증언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다 감안해서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는가"

 

보수 세력의 반응 - 안병직 서울대 교수 반응

 

안병직 교수는 2011년 5월 26일에 출간한 책 《보수가 이끌다-한국 민주주의 기원과 미래》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안 교수는 1964년 8월 수사기관이 발표한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을 4·19 이후 최초의 좌익운동으로 평가했다.

안 교수는 1962년 대학원에 진학해 빨치산 출신의 인혁당 가담자인 박현채를 만나 교육을 받았다.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의 저술을 탐독했고 한용운과 신채호의 사상에 따라 결국은 민족주의를 중심축으로 하는

사회주의자가 됐다.

 

인혁당의 조직 목적은 당시 활발하게 전개되던 학생운동을 지도하는 것이었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그는 평가

했다.

 

당시 학생운동은 서울대 문리대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는데, 인혁당이 박범진 전 의원 등을 중심으로 이들 운동

단체에 하부조직을 심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지난해 박 전 의원이 인혁당의 실재에 대해 증언한 것을 상기시키며 인혁당은 남한에서 자발적으로 생긴

공산혁명을 위한 조직이었다고 증언했다.

 

- 안병직 교수 증언록을 통해 본 '5대 시국사건'". 동아일보. 2011-05-25


 

제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었던 박범진 전 국회의원은 '당시 인혁당의 강령 내용은 민족 자주적인 정권을 수립해서 북한과의

협상으로 통일을 시도한다는 것이었다'고 밝히며, '위에서 아래로 관리하는 지하당'이었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과거사위의 발표처럼 지하당이 아닌 이념서클이었다면 구성원을 비밀로 할 필요가 있었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다만, 소위 전향하였음을 근거로 인혁당의 실체를 주장하는 이들이 말하는 그 실체는 제1차 사건의 인혁당을 말하는

것이고, 제2차 사건의 실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주장의 궤를 달리 함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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