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 '사랑아, 강을 건너지 마라'
공무도하
구지가, 황조가, 헌화가, 처용가....
고등학교 때 배운 고전 시가들이 줄줄이 생각이 나면서 입에서는 ‘아으 다롱디리’만 맴돕니다. <공무도하> 뭐였더라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사랑아, 강을 건너지 마라’ 아~아~생각났습니다.아내가 그렇게 강을 건너지 말라고 했는데 말을 듣지 않고 기어이 강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어버린 그 백수광부 이야기.. 그렇다면 시대적 배경은 아마도 먼 고조선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첫 장을 넘기니?
-장마 전선이 제주도 남쪽?..
-서울 서북 경찰서..?
의외로 시대적 배경은 현재, 바로 지금 이야기였습니다.
<공무도하>,문장체는 간결했고 소설속의 현실감에 숨가쁘게 젖어들었습니다. 전개 부분을 읽으면서 몸이 물에 잠기고 노폐물과 오물의 악취가 나는 듯 했습니다.
운명적 삶
추적 60분이나 PD수첩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홍수, 강간, 살인사건, 노조파업, 철거지역 보상 문제, 방화사건, 극빈층 아동 문제 등 어이없고 긍정할 수 없는 죽음들이 신문기자 문정수를 통해 재조명 되었습니다. 문정수는 어느 쪽이 양심이고 진실이며 정의에 가까운지 답답하고 막막할 뿐입니다. 대부분답답하고 막막한 쪽은 기사화하지 않았습니다.
각자의 입장에 서있는 당사자들에 대한 배려와 어쩔 수 없는 침묵일 것입니다.모든 사건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지요. 제3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겠지요.하지만 결국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삶 때문이기도 합니다.
현실을 강하게 부정 할수록 초침처럼 빠르고 군화의 굽소리처럼 강하게 밀려오는 사건들. 해결하려고 달려들수록 오리무중으로 빠져버리는 인간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 이웃, 우리 가족, 우리 자신의 인생일 수도 있습니다.
저자 김훈의 글은 국어사전을 끼고 알지 못하는 단어들을 찾아가며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감지는 하고 있지만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과정들을 적절하고 반어적인 표현으로 공감을 이끌어내고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마력을 느끼게 하지요.
현재의 빛
노목희가 타이웨이의 글을 표현한 대목에서는 저자 김훈의 글이기도 합니다.
-의문이 발생할 수 있는 근거의 정당성 여부를 살피고 있었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하려고 떼를 쓰지 않았으며...
-미리 설정된 사유의 틀안에 이 세상을 강제로 편입시키지 않았고 그 틀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세상의 무질서를 잘라서 내버리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결론 지으려 하지 않으면서 긍정이나 부정, 그 너머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가 보여주는 모든 폐허 속의 빛은 현재의 빛이었다. (p.26)
육체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만 자신을 찾기 위한 정신은 거칠어진 인간 관계와 엉켜버린 자아의 세계 속에서 투쟁하듯 방황하는 저자의 글에서 묻어납니다.
-남은 시간들 흩어지는데 나여, 또 어디로 가자는 것이냐. -작가의 말
시작과 끝
저자 김훈의 글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멸, 순간, 신생이란 단어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묶게 됩니다. 하지만 <공무도하>에서는 강을 사이에 두고 강의 이편과 저편의 세계를 나누어서 생각하게 됩니다. 강의 이편이 시작이고, 치열한 삶이고, 현실에 대한 억울한 수용이라면 강의 저편은 끝이고, 도피이고, 죽음이며, 이룰 수 없는 이상, 현실 거부일 것입니다.
안개 낀 강을 사이에 두고 강의 이편에서는 여옥이 목놓아 울고 강의 저편에서는 백수광부가 이리로 오라는 듯 힘없이 손을 흔드는 것만 같습니다.
여옥의 눈에는 백수광부의 힘겨운 손짓이 보이질 않는군요.
가여운 삶
살아내려고 발버둥치는 가여운 삶이여..
이대로 순리대로 하기엔 불안합니다. 하지만 뒤돌아보고 앞을 보아도 후회스럽긴 마찬가지이지요. 무엇이 정답이고 오답인지 모른 채 오늘도 묵묵히 살아낼 뿐입니다. 주저의 흔적으로 얼룩진 노목희의 화폭처럼.
원리와 현상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원리와 현상이 다르지 않다고 믿은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그렇게 믿는다면 이 뾰족하고 울퉁불퉁한 세상을 인내하며 조금은 행복하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