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보기

성삼문,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다 김질의 밀고로 멸문 당하다.

반응형

 

 

 

성삼문,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다 김질의 밀고로 멸문 당하다.

 

 

성삼문(成三問, 1418년 ~ 1456년 6월 8일)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대왕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본관은 창녕이다.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손자이다.

 

생원으로 1438년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1447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였으나, 신숙주, 정인지 등이

세조의 편에 서고 김질 등이 밀고함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그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13회나 찾아가 왕래

하며 그로부터 정확한 음운(音韻)과 언어 연구를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

구하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생육신인 성담수, 성담년은 그와 6촌간이며 이기, 이행 등은 외종질이다.

그의 남계 친족은 모두 몰살당했고, 외손 박호의 후손, 외손 엄찬의 후손과 유자미의 며느리가 된 손녀딸의 후손만이 현전한다.

 

성종 때부터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숙종 때 가서 복권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추앙받게 된다. 충청남도 출신.

 

생애 초반

 

1418년 성삼문은 충청남도 홍주(洪州, 현재의 홍성군) 홍북면 노은동(魯恩洞)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를 막 낳

으려고 할 때에 공중에서 하늘이 “낳았느냐?”라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났으므로 하늘이 세번 물었다 하여 그의 이름을 삼문

(三問)이라 이름을 지었다 한다.

 

형제인 삼빙, 삼고, 삼성이 있는데, 이 중 성삼빙은 성삼문의 형인지 동생인지 여부는 다소 불확실하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으로서 문과에 급제, 이후 관직에 올라 집현전의 학사의 한사람으로 신숙주, 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이때 뒷날 생사를 같이 한 하위지가 그의 과거 급제 동기생이다.

집현전학사로 뽑힌 뒤 수찬을 지냈다.

 

관료생활 초기, 그는 집현전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이때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신숙주와 함께 훈민정음 정리 작업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기 위해 신숙주와 함께 13 차례나 요동에 다녀오기도 했다.

 

집현전과 훈민 정음

 

귀국 후 집현전수찬을 거쳐 직집현전을 지냈다.

 

1442년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이석형 등과 함께 한양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세종의 명으

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 禮記大文諺讀〉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이어 세종대왕이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참여하여,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이개(李塏), 최항 등과

함께 이를 도왔다.

 

가장 공이 컸는데 종의 명으로 당시 성균관 주부로 재직 중 집현전 교리 신숙주, 행 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 등과 함께 명

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를 찾아가게 된다.

 

그런데 마침 죄를 짓고 요동에 귀양 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을 만나게 되어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여 음

운(音韻)에 관한 것을 의논하고 되돌아왔다.

 

또한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는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학자들을 만나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와 이를 보고

하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1446년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이야기를 듣고 몽유도원도를 그리자 이에 대한 찬시를 써서 헌정했다.

1447년 중시(重試)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관료 생활

 

1447년 경연시강관(侍講官), 사간원 우사간, 집현전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그 후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는데 참여하였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학

문을 강론하였다.

 

세종이 만년에 숙환으로 온천에 갈 때 성삼문과 박팽년·신숙주·최항·이개 등을 항상 대동하고 고문으로 삼았다.

 

1451년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하자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東方巨擘, 동방에서 가장 학

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이후 예조 참의,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와 좌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세종은 병약한 세자(문종)도 오래살지 못할 것을 예견하고 집현전의 학사들을 불러서 어린 원손 홍위(후일의 단종)를 부탁한

다는 유지를 여러 번 남겼다.

 

성삼문 역시 집현전 학사로 그의 유지를 받들게 되었다.

 

계유정난 전후

 

1453년(단종 1)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를 사살하고 집현전 여러 신하들에게 정

난 공신(靖難功臣)에 책록한다.

 

수양대군은 집현전학사들을 포섭하기 위해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등 집현전학사 36명과 함께 그를 집현전 관원으로서 직숙

(直宿)한 공이 있다고 하여 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모두들 순번으로 축하연을 베풀었으나, 성삼문은 수치로 여기고 혼자만이 연회를 베푸는데 참여하지 않았다.

 

단종의 양위 직후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양위로 즉위하자 그는 이를 찬탈로 규정했다.

왕위에 오르니 성삼문은 예방승지로서 국새(國璽)를 안고 통곡하였다.

 

 성삼문은

 

"국새(國璽)는 옮겨졌지만 주상(主上)이 아직 계시고 우리가 있으니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

 

며 단종복위운동을 결심했다.

 

그리고 이후 받은 녹봉은 월별로 표시하여 취하지 않고 집 근처의 곡간에 별도로 쌓아두고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할 때 신숙주에게 참여를 요청하였지만 신숙주는 비현실적이라며 참여를 거절한다.

 

한편 신숙주는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는 절친한 벗이었지만, 성삼문은 단종 복위 거사를 도모할 때

 

'비록 신숙주는 나의 평생 벗이긴 하나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

 

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숙주는 자신을 위협할 세력을 보낼 것을 미리 감지하고 은신해 있었다.

 

세조와의 갈등

 

수양대군의 집권과 권력 장악에 이르는 과정에서 수양대군의 특별 배려로 그는 집현전의 다른 학사들과 함께 등용되고 그의

자문역할로서 배려를 받았지만 그는 수양대군의 왕권 강화 정책에 부정적이었다.

 

그는 단종의 복위를 역설했고 집현전 학사들과 조정의 신하들 중 일부는 그의 결의에 동조했다.

 

성삼문과 집현전 학사들이 복위운동에 나섰던 것은, 단종에 대해 충절을 지킨다는 유교적 명분이 있었지만, 그는 세조의 독단

에 반대했고 관료지배체제의 구현을 이상으로 삼았기에 세조의 독주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세조가 즉위 직후부터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는 등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조치를 취하자 집현전 출신 유

신들은 크게 반발했다.

 

단종 복위 운동

 

단종 복위 운동은 그를 포함하여 집현전 출신 관료들과 그 주변 무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세조 부자를 죽이거나 거병을 하면 각지에서 호응할 계획도 세워놓았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 박중림(朴仲林), 박팽년, 유응부, 권자신(權自愼), 금성대군, 이개, 유성원, 윤영손(尹鈴孫), 김질(金礩)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세조의 반정에 반대하여 외부로 나가거나 사퇴한 전직 관료들과도 연락하였다.

 

이들은 1456년(세조 2) 6월 명나라 사신이 한성부에 도착, 바로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향

응을 베풀기로 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기회로 삼아, 왕의 운검(雲劒, 큰 칼을 들고 왕을 시위하는 것)을 맡은 성승과 유응부

로 하여금 세조와 의경세자 부자 및 그 측근을 처치하도록 계획했다.

 

그러나 이 정보는 누군가에 의해 한명회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사 당일 이들의 움직임을 이상하게 본 한명회와 신숙주의 권고로 세자와 운검의 입장이 폐지되자 성삼문은 거사를 중지하고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그러나 계획에 갑자기 차질이 생기자 거사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 한 김질은 전부터 이를 알고 있던 자신의 장인 정창손의 권

고와 회유로 이를 세조에게 이를 밀고하였다.

 

바로 성삼문은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의금부에 체포, 투옥되었다.

 

단종 복위 실패와 투옥

 

아버지 성승·박팽년 등과 같이 상왕(上王 :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에 착오가 생겨 세조의 직접 심문과 가혹한 고문 끝에

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와 함께 군기시(軍器寺)(지금의 태평로 근처)에서 처형되었으니 이를 사육신이라 한다.

 

사형에 임하여 그는 죽기 전에 시 한수를 지었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굶주려 죽을진들 채미를 먹는 건가
비록에 부새엣것인들 그 뉘 땅에서 났다니


처음에 그들은 명(明)나라의 사신이 왔다가 돌아가는 송별연회 석상에서 세조를 죽이고 이어서 한명회·정인지·권남 등 일파를

없애버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연회 당일, 세조는 갑자기 자리가 좁으니 운검(雲劍)은 그만두라고 지시하였다.

 

이 운검은 임금이 정좌한 앞에 큰 칼을 들고 서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도총관으로 있던 성승(成勝:성삼문의 아버지)과

유응부가 운검으로 내정되어 그 자리에서 처치하기로 한 것이었다.

 

유응부는 그대로 하려고 주장하였으나 성삼문이 극구 말려서 후일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에 같이 모의하던 김질이 성사가 되지 않는 것을 보고, 사실을 밀고하니 그들은 체포되었다.

 

형문과 최후

 

6월 체포된 다음 날 달군 쇠로 다리의 살을 뚫고 팔을 잘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신숙주를 배신자, 반

역자라며 꾸짖고 고집을 꺾지 않는 기개를 보였다.

 

6월 8일 그는 성승,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박중림, 김문기, 박쟁(朴崝) 등과 함께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형(車裂刑)

을 당했다.

 

이일로 인해 성삼문은 처형되고 성삼문의 일가는 멸족을 당했는데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을 비롯해 동생 성삼빙, 성삼고, 성삼

성과 아들 성맹첨(孟瞻), 성맹년(孟年), 성맹종(孟終) 등 남자는 모조리 살해당해 혈손이 끊기고 조부 성달생의 묘는 훼손되었

으며, 그의 아내와 딸은 박종우의 집 노비로 분배되었고 다른 딸들은 관비가 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이미 박씨와 엄씨 집으로 시집 간 두 딸만이 화를 모면하였다.

그 외에 그의 가까운 일족으로 당숙 성희 등은 유배되었다.

 

사후

 

거열형에 처해진 그의 시신은 조선 8도에 조리돌림되었고, 그의 시신과 그의 일가족의 시신 일부를 김시습 등이 수습하여 노량

진에 매장하였다.

 

이 묘는 후에 누군가 비석을 세워 성씨지묘 라 하였다. 한편 팔도로 보내진 시신 중 한쪽 다리 부분은 충청남도 연산군 은진 양

촌리(현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 58)에 안장되었다.

 

이후 비석이 없던 논산의 묘소는 숙종 때 가서 비석과 신도비가 세워지고 사당이 세워져 제향되었다.

 

또한 그의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그의 부모 묘소 근처에도 성삼문의 유품을 동리 선비들이 묻고 제사를 지내

던 가묘가 전한다.

 

그의 유품을 모신 묘소 근처에는 1668년(현종 9년) 송시열의 문인이자 관찰사로 왔던 민유중이 추모표를 세우고, 뒤이어 숙종

때 우암 송시열이 묘소의 실전을 막기 위해서 친필로 쓴 유허비가 세워졌다.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거사 관련자 70여 명은 각각 죄명에 따라 혹형, 처형, 유배 등을 당했고 그 관련자 500여

명도 처형당했으며 부녀자들은 관비나 기생, 공신의 여종, 첩으로 분배되었다.

 

그 중 성삼문은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

 

아버지 성승을 비롯하여 형 성삼고(成三顧), 동생 성삼빙(成三聘), 성삼성(成三省)과 조카들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되

어 일가족은 몰살당하고 만다.

 

복권

 

성삼문은 대역죄인으로 처형을 당했으나 그의 충절을 기리는 움직임은 사림 집권후 계속되었다.

김종직, 조광조, 홍섬, 이이, 김집, 송시열 등이 그의 충절을 논했으며, 사육신의 복권 여론을 주청했으나 실패했다.

 

남효온(南孝溫)은 자신의 저서〈추강집 秋江集〉에서 그를 비롯하여 단종복위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명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겼다.

 

성종때 사림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복권 여론이 나타났다.

그 뒤 중종 때 조광조 등 사림이 집권하면서 다시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기묘사화로 사림이 몰살당하면서 다시 수그러들었다.

 

이후 숙종 때 다시 노론 계열에 의해 복권 여론이 나타났다.

1691년(숙종 17년) 사육신의 관직이 복구될 때 관작이 복구되었고, 노량진 사당에는 민절(愍節)이라는 사액을 내려졌다.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그의 옛집은 녹운서원(綠雲書院)이 되었다.

영조 조에 들어서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문(忠文)의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노량진 민절서원, 의절사(義節祠),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 홍주

노은서원, 논산의 사당, 의성의 학산 충렬사(鶴山忠烈祠), 창녕 물계세덕사(勿溪世德祠), 연산(連山) 충곡서원(忠谷書院), 충청

남도 공주의 동학사 숙모전(東鶴寺 肅慕殿) 등에 6신 및 단종 때의 순절신들과 함께 배향되었다.

 

현대

 

흥선대원군 때 홍성군의 노은서원이 헐리자, 후일 홍성의 유림들은 위패를 근처에 묻고 노은단을 세워서 계속 제사하고 있다.

1910년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사육신은 충절의 상징으로 여겨져왔고 성삼문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 추앙받았다.

 

1960년대에 이르러 노량진의 사육신 묘소가 현창되었고, 1970년대에 와서는 충청남도 홍성군에 있는 본부인의 묘소와 아버지

성승과 생모의 묘소가 모두 성역화되었다.

 

논산군에 있는 시신 일부를 매장한 묘소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1호로 지정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