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 윤씨,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내어 폐비가 되다.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55년 7월 15일 (음력 윤 6월 1일) ~ 1482년 8월 29일 (음력 8월 16일))는 조선의 제9대 왕 성종의 계비이
며 둘째부인이다.
조선 10대 왕 연산군과 대군을 낳았으므로 두아들에겐 생모가 된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에 지위에 있다가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王妃)로 책봉되었으나 남편 용안에 상처
를 내어 폐비(廢妃)당했다.
그러나 연산군 즉위후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왕비(王妃)의 작호가 추존되었다.
봉상시 판사(奉常寺 判事)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 尹起畝) 와 장흥부부인 신씨(長興府夫人 申氏)의 딸로 윤관의 11대손
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남편인 성종의 후궁들 문제로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와 고부갈등으로 유명하며,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낸 일로 인해 폐비(廢妃)
된 후 사사되었다.
사사 당시 윤씨는 친정어머니 장흥부부인 신씨(長興府夫人申氏)에게 세자가 자라서 왕이되거든 피를 토한 금삼을 넘겨줄 것
을 유언했고, 이는 후일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도화선이 된다.
연산군은 자신의 모친이 되는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왕비(王妃)의 작호를 추숭시켰다.
그러나 중종 반정이 일어난 후 왕후(王后)의 호는 삭탈되었다.
신숙주는 그의 외당숙이며, 명종 때의 권신 이량은 그의 오빠 윤구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출생과 가계
흔히 생년이 불분명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폐비 윤씨 태실의 태지에는 그녀가 1455년 음력 6월 1일에 태어난 것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봉상시 판사(奉常寺 判事)를 지낸 윤기견과 장흥부부인 고령 신씨의 딸로 태어났으며, 3명의 이복 오빠와 1명의 친오빠가 있
었다.
할아버지 윤응(尹應)은 통훈대부(通訓大夫) 교하현감(交河縣監)이었고, 증조 할아버지 윤득룡(尹得龍)은 조선조정에 처음 벼
슬하여 자헌대부 (資憲大夫) 와 호조판서 (戶曹典書) 를 역임했다.
고조부 윤희(尹禧)는 고려조에서 정순대부(正順大夫)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지낸바 있다.
일부에서는 그녀의 아버지 윤기견의 죽음으로 인해 집안의 생계가 어려워지자 궁녀로 입궁했다고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는 정희대비가 그녀를 훗날의 정현왕후가 되는 윤호의 딸과 함께 입궁시켜 숙의(淑儀)의 첩지를 내린 사실이 명백히 표기되
어 있다.
입궐과 간택
윤씨는 성종 4년(1473년) 4월 15일(음력 3월 19일)에 후궁간택으로 숙의(淑儀)에 봉해졌다.
성종 5년(1474년)에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가 승하하자 성종은 2년 뒤 공혜왕후의 3년상을 마치고 1476년 7월 31일
(음력 7월 11일)에 숙의(淑儀)였던 윤씨를 왕비(王妃)로 삼을 것을 전교하였다.
당시 윤씨는 임신 중인 몸으로, 8월 27일(음력 8월 9일) 왕비(王妃)로 책봉되어 3개월 뒤인 11월 23일(음력 11월 7일)에 원자를
낳아 중전(中殿)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바로 그의 아버지는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 에 추증되고 함안부원군(咸安府院君)에 추봉되었다.
폐출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여자 관계가 복잡한 남편인 성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
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성종이 자신의 처소인 교태전 에 들르지 않고 다른 후궁들의 처소만 찾자, 다른 후궁들을 질투하
여 잡아다가 추궁, 취조하는 등의 행위를 하다 성종의 눈밖에 났다.
남편과 말싸움 중 남편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분노를 샀다는 설이 있으며, 다른
설로는 삼사의 탄핵으로 폐출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그녀에 대한 왕실의 사후 예우를 본다면 왕실의 눈 밖에 나 폐위된 것이
유력하다.
또한 경쟁관계에 있던 성종의 다른 후궁들이 인수대비를 찾아가 윤씨를 비판하며 그녀의 폐위를 부추기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등으로 윤씨는 마침내 1479년, 자신의 생일 바로 다음날인 음력 6월 2일(양력 6월 21일)에 왕비(王妃)에서
폐위되었다.
폐비(廢妃)된 이후 조정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원자의 생모이자 조강지처가 되는 윤씨를 다시 왕비(王妃)로 복위시켜야 된
다는 상소와 시위가 끈임없이 반복 되었으며 , 많은 조정대신들이 파직당하거나 유배를 갔다.
여기서. 윤씨를 복위시켜야 된다고 하여 유배를 갔거나 파직당한 대신들은 연산군이 즉위함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반대
로 윤씨를 폐위에 앞장을 섰다거나 복위에 동참하지 않은 대신들은 무작위한 보복을 당했다.
대표로 한명회 한치형 윤필상 등이 있다.
인수대비는 원자가 더 자라서 자신의 어미얼굴을 기억할까봐 하루빨리 새 중전(中殿)을 새워야 된다는 명분으로 훗날의 정현
왕후가 되는 숙의 윤씨(淑儀 尹氏)를 왕비(王妃)로 책봉시켰다.
사사 사건
당시 조정에서는 그녀가 폐비(廢妃)가 된 이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는 반성하는 점, 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
어 그녀를 살려 두고자 하였으나, 숙의 엄씨 와 귀인 정씨 등의 사주로 인해 궁녀들이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 와 성종에게 허
위 보고를 하였다.
결국 윤씨는 1482년 8월 29일(음력 8월 16일) 사약을 받아 사사되고 말았다.
윤씨의 나이 28살이었으며, 윤씨는 죽기 전 자신의 피가 묻은 금삼을 친정어머니 장흥부부인 신씨(長興府夫人 申氏)에게
"세자가 자라거든 이를 전달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고, 결국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면서 1504년에 갑자사화 등
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로 인해 한명회, 한치형 등의 사람들이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 이외의 사람들이 사사되거
나 유배되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의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齊獻王后)에 추숭되고, 회묘는 회릉(懷陵)으로 격상되었다.
사후
사후 경기도 장단에 매장되었으나 장지가 좋지 않다는 지관의 지적으로 신하들의 건의가 있자, 성종은 1488년(성종 19년)경 한
성부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로 이장을 하였다.
뒤에 윤씨의 묘가 회묘, 회릉, 회묘로 변경되면서
이는 지명이 되어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의 지명 유래가 되었다.
성종은 폐비 윤씨의 묘를 '윤씨지묘(尹氏之墓)'라 비석을 세우고, 제관 2명을 보내 기일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되, 묘의 이름을
영구히 고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후에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묘는 회묘에서 효사묘(孝思墓)로 바꿨다가 다시 회릉으로 격상시켰다.
연산군 사후
그 뒤 무덤은 현 위치인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신동(현 고양시 덕양구)로 이장하였으며, 서삼릉 내에 위치한 회묘(懷墓)이다.
왕비(王妃)의 예에 따라 능으로 개장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화려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어 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윤씨에게 올린 관작과 존호는 모두 삭탈되었고,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회묘 근처에는 후궁 묘역이 있으며, 그 중 윤씨의 묘소는 봉분이 크고 석물들이 존재하고 있다.
친정오빠 윤구의 손녀사위는 명종비 인순왕후의 외삼촌이자 권신인 이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