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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여왕, 국정을 어지럽혀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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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여왕, 국정을 어지럽혀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다.

 

진성여왕(眞聖女王, ? ~ 897년 12월 31일 (음력 12월 4일), 재위:887년 ~ 897년 음력 6월 1일)은 신라의 제51대 여왕이다. (金)씨, (曼) 또는 (垣)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경문왕과 문의왕후 김씨의 딸이자 헌강왕정강왕의 여동생이다. 생년은 미상이나 그녀의 부모인 경문왕과 문의왕후가 860년에 혼인했고 진성여왕이 그들 사이에서 3번째 자식인 점 그리고 문의왕후가 870년에 사망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볼때 860년대 중후반정도로 추정된다.

887년부터 89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887년부터 888년까지 이벌찬(각간) 김위홍(金魏弘)이 대리청정을 맡았고 김위홍(金魏弘)이 서거한 888년부터 897년 음력 6월 1일 조카 김요(효공왕)에게 선위할 때까지 친정하였고 퇴위한지 6개월 후인 897년 12월 31에 붕어하였다.

최치원이 쓴 양위표(讓位表)와 사사위표(謝嗣位表) 그리고 낭혜화상탑비 등에 의하면 성군(聖君)이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막내아들로 양패를 두었다고 나와있으나 어디까지나 삼국유사 설화 속의 이야기로 실제로는 자식이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진성여왕은 경문왕과 문의왕후의 소생이다. 둘째오라버니인 정강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정강왕의 유언에 따라 887년 음력 7월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하였다.

소행이 좋지 못하고 음란하기 그지없었던 진성여왕은 색욕에 빠져 수많은 미소년들을 징집하여 처소로 불러들인 뒤 음사를 즐기는 데에만 주력하여 나랏일을 제대로 돌보려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여왕과 관계를 맺은 정부들과 여왕에게 아첨하는 간신들의 무리가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상벌이 함부로 행해지고, 뇌물이 난무하고, 관직을 매수하는 등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자연스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가는 데다가 여왕의 심한 낭비로 국고가 텅텅 비어 각 지방의 호족들을 닦달하여 세금 납세를 독촉하였다. 그러자 민심은 점차 흉흉해져 여기저기서 민란과 도적이 숱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의 호족들은 각자 독자적 세력을 키우는 데 전념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들을 도적이라고 부르며 군대를 파견해 진압을 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로 조정의 힘은 겨우 수도인 서라벌 주변에 한정될 정도로 급격히 쇠락해갔으며, 지방 호족들은 서로 간에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다. 치열한 싸움 끝에 살아남은 견훤궁예가 각자 나라를 세우자 후삼국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이렇듯 나라가 분열해가자 894년 진성여왕은 최치원을 아찬으로 임명하여 그의 조언에 따라 조정을 일신하고자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897년 음력 6월 1일 (양력 7월 4일), 병마에 시달리던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서자(庶子)인 를 왕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러고는 그해 897년 음력 12월 4일 (양력 12월 31일)에 승하하였다. 각간 김위홍대구화상에게 명하여 《삼대목》을 편찬케 하였으나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삼국유사는 진성여왕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보고있다.

삼국사기에는 진성여왕이 위홍이 죽은 뒤 젊은 미남 두세 명을 남몰래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요직을 맡기면서 국정이 문란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거리에 국정을 비판하는 글이 붙을 정도로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유모인 부호부인과 그녀의 남편인 위홍 등 서너 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국정을 어지럽혀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최치원의 사사위표에는 진성여왕이 사심이 없고 욕심이 적으며, 몸에 병이 많아 한가함을 좋아하고, 말해야 할 때가 된 뒤에야 말을 하고, 한번 뜻한 바는 빼앗지 못하는 굳은 의지를 지닌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최치원이 쓴 양위표나 낭혜화상탑비등에서도 진성여왕을 성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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