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태자,금부대왕
어떻게 천 년의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단 말입니까?
마의태자(麻衣太子, 912년~?)는 신라 마지막(제56대) 왕 경순왕의 왕자이다. 성은 김(金)씨, 휘는 일(鎰 또는 溢)이라 전하며, 일명 금부대왕 또는 김부대왕(金傅大王)으로도 불린다. 신라왕후의 적자임과 동시에 화랑 효종랑의 손자이다.
5남인 김분과 함께 고려에 귀순하려는 아버지 경순왕을 만류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라를 떠나 금부리에서 충신 지사 일민들과 함께 조국 광복의 숭념을 발의하였다. 후에 개골산(皆骨山)에서 대절을 지켰으므로 그 증손에 이르러서야 대의를 실행한다는 명분으로 나라에 출사하게 되었다.
이찬을 지낸 효종랑의 적자인 경순왕은 사직이 불안정한 때에 대기에 올라 방국 수호의 책무를 지게된 것이다.
서라벌로 쳐들어온 직후 신라의 구원요청으로 태조 왕건이 몸소 거느리고 온 1만의 기병까지 공산 전투에서 궤멸시키고 승승장구하던 견훤은 경순왕 4년(930년) 1월의 고창 전투에서 왕건에게 대패하면서 주도권을 고려에 빼앗겼다. 재암성(載巖城)이나 고창(안동부)은 물론 영안(永安)·하곡(河曲)·직명(直明)·송생(松生) 등 30여 개의 군현과 동해 바닷가의 명주(溟州)에서 흥례부(興禮府)에 이르기까지 총 110여 성과 부락이 고려에 항복하는 등 수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모두 상실한 신라는 이미 경주 지역의 지방 정권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한편으로 고려는 국왕인 왕건이 직접 수도 서라벌을 방문해 경순왕을 찾아 위로하며 "예전 견훤이 왔을 때에는 승냥이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았는데, 지금 왕공 (王公)이 오니 미덥기가 그지 없다."는 호평을 들을 정도로 서라벌의 민심을 얻었고, 경순왕의 종제 유렴(裕廉)을 질임으로하여 개경으로 데려가는 등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키워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경순왕 9년(935년) 10월, 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왕건에게 국토를 모두 바치고 항복할 것을 논의하게 되었다. 신하들의 의논도 엇갈리는 가운데 왕자가 나서서 강하게 반대했다.
國之存亡必有天命只合與忠臣義士收合民心自固力盡而後已豈冝以一千年社㮨一旦輕以與人
나라의 존망이라는 것이 천명(天命)에 달려있기는 하지만 충신(忠臣), 의사(義士)와 함께 민심을 수습해 스스로 지
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그만두어도 늦지 않습니다.
어떻게 천 년의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삼국사기》
그러나 경순왕은 "이젠 더 강해질 수도 약해질 수도 없는데 버텨봤자 죄 없는 백성만 더 괴롭힐 뿐"이라며 끝내 항복을 청하는 글을 지어 고려에 보냈고, 왕자는 바로 금부리에서 두 아들 그리고 대의지사와 함께 세력을 이루었다가 시간이 흘렀고 개골산에 들어가 베옷을 입고 거하였다. 11월에 왕건이 신라의 항복을 받아들여 경순왕을 개경으로 불러들이고, 서라벌을 경주로 고쳐 고려의 군현으로 편입시키면서 신라는 멸망했다.
후세의 평가
금부대왕의 얼자인 김은열의 묘지명에 태자공의 휘가 쓰여있었다고 전하고 있다.나라를 들어 항복하려는 아버지와 고려에 맞서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마의태자의 행동은 유교적 대의명분론에 비추어 윤증이나 신흠 같은 조선의 유학자들로부터 재조명되고 칭찬받았는데, 오운의 《동사찬요》(東史纂要)를 비롯해, 안정복은 저서 《동사강목》에서 마의태자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윤증이나 신흠 같은, 조선의 문인들이 마의태자의 행적에 대해서 읊었던 한시 작품들의 초의(草衣)' 또는 '신라왕자'(《상촌집》)로만 다루어질 뿐으로, '마의태자'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대중에 퍼지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 때 이광수가 1926년 5월부터 1927년 1월까지 『동아일보』지면에 연재했던 신문소설 「마의태자」를 통해서였다. 이후 극작가 유치진이 마의태자를 주제로 한 동명의 희곡을 발표하였으며, 이후 '마의태자'의 비극적인 이미지가 대중들 속에 자리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