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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온건개혁가인 포은 정몽주의 후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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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온건개혁가인 포은 정몽주의 후대 평가

 

 

정몽주(鄭夢周, 양력 1338년 1월 13일 (1337년 음력 12월 22일) ~ 1392년 4월 26일(음력 4월 4일))는 고려 말기의 문신·외교관이자, 정치가·교육자·유학자이다. 본관은 연일(迎日),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려 삼은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136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출사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성균관대사성, 예의판서, 예문관제학, 수원군 등을 지내며 친명파 신진사대부로 활동하였으나 역성혁명과 고려개혁을 놓고 갈등이 벌어졌을 때 온건개혁을 선택하였으며, 명나라에 외교관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관직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과 익양군충의백에 이르렀다. 역성혁명파의 조선건국에 반대하다가 1392년(공양왕 2년) 4월 이성계의 문병차 돌아가던 길에 개경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경상북도 우항리 출신이며, 이색의 문인이라고하나 기록은 없다. 그의 제자들 중 길재사림파의 비조가 되었고 권우세종대왕의 스승이 되었다. 그의 손녀는 정종의 서자 선성군의 부인 오천군부인이 되었고, 서손녀는 한명회의 첩이 되었다. 삼봉 정도전의 오랜 친구였으나 역성혁명과 온건개혁을 놓고 갈등하던 중 정적으로 돌변했다.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이성계,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이방원 일파에 피살되었다. 암살 직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후에 1401년(태종 1년) 태종의 손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추증(追贈)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태종정도전, 남은을 제거한 후 정도전 등을 격하시키기 위해 조선건국에 반대하고 피살당한 그를 의도적으로 충절의 상징으로 격상시켰으며, 이는 사림파가 집권한 후에도 그의 문하생이라서 그에 대한 현창과 성인화가 계속되었다. 그 뒤 1990년대에 와서 성인화된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나타나고 있다.

 

평가

정몽주는 고려 말기 무신 세력의 몰락과 함께 세를 얻어가던 신진 사대부 세력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고려에 새로 도입된 성리학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학자 관료들의 지도자로서 높은 학식으로도 존경을 얻고 있었다.

무력을 바탕으로 부패한 고려 조정을 뒤엎으려 한 이성계와 손잡고 고려 말 정치를 좌지우지하였으나 고려 사회의 체제를 지키려 한 정몽주와 역성혁명을 도모하던 이성계는 궁극적인 목표가 서로 달라 결국은 사이가 틀어졌고 그것이 곧 정몽주의 처형으로 이어졌다는 시각이 있다. 그는 한국의 초창기 성리학자로서 《주자가례》에 따라 사회 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의례제도 개혁을 꾀하였다.

불교 국가였던 고려를 유교 이념을 중심으로 한 정치 형태로 탈바꿈하려 했던 그의 시도는 비록 실패했으나, 정도전 등에게 그 뜻이 이어져 유교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한 조선 조정을 탄생시켰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불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유학을 보급했다. 또한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 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였다. 외교정책과 군사정책에도 관여하여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했으나 이성계의 신흥세력에 꺾였다. 한때 그의 친구이자 같은 스승 이색의 문하생인 정도전은 그를 가리켜 '도덕의 으뜸'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는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중시조로 추앙되었다. 그러나 사림에 의해 충절의 상징으로 여겨졌는데, 이는 그의 제자와 정치적 계승자인 사림파 외에도 그를 현창함으로써 정도을 격하하려는 이방원 등의 의도도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부적절한 인물을 과거에 합격시켜 준 일 등이 그런 것이지만, 특히 자신이 왕으로 섬긴 우왕창왕 두 왕을 왕씨가 아닌 신씨라고 몰아서 죽음으로 내몬 정치적 행위에 동참한 것은 고려의 충신이라는 수식어와 잘 조응하지 않는 것 같다. 는 비판도 존재한다.

또한 나라의 어려움에 이성계를 이용하고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여 정치적 입지를 마련한 최영을 적대적으로 보았던 신진사대부의 한사람으로 신진사대부가 고려 조정의 핵심으로 등장하자 득세를 하였지만 신진사대부 중에 정도전, 조준, 권근 등에 의이성계의 조선 개국, 역성혁명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고 반대하다가 이방원 일파의 조영규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러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한 이방원은 정도전을 격하할 의도와, 그의 충신 이미지를 부각시켜 새 왕조에 저항하는 세력을 도덕적으로 억제하려는 등의 정치적 효과를 보고 그를 충절의 대상으로 격상시켰다는 것이다.

그가 정도전 등을 제거하려고 계략을 쓴 것 역시 정당한가 여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정몽주가 조선 건국 세력의 동참했다면, 그에게 부귀영화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반면 군권과 조정을 장악한 상태에서 정치적 명성과 명분을 제외한다면 아무 것도 없는 정몽주가 이들과 대립한다는 것은 사실상 죽음을 좌초하는 것이다.

애당초 조선 건국 세력이 평화적 정권 교체를 주장했고, 이성계가 그의 살해를 반대하고 있는 상화이었기에 그는 죽지 않았다. 우연히 이성계가 병으로 쓰러졌고, 마침 정도전의 가계에 약점을 잡아 공격하는 등 사실상 정치적 공격을 제외한다면 무력적 개입은 전무했다. 공양왕이 이성계의 눈치를 보면서도 밀어주었기에 이들을 압박 할 수 있었다. 이를 타계하려고 이방원이 그를 살해한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공양왕은 이성계와의 타협 조차 실패해 왕위를 내주어야 했다.

이를 본다면 사실상 정몽주를 제외하고는 조선건국세력을 견제할 세력이 사실상 없으며, 정몽주는 고려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던 것이다.

단순 충신 이미지로 남아 있지만, 고려사 열전에는 여러 외압에도 인사행정을 옳바르게 했으며, 이성계와 아기발도가 충돌한 황산대첩에 참전했다. 일본으로 가 포로를 되려오는 등 단순 충신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나라를 위해 일한 정치인이다. 비록 정도전이 이인임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에 견제로 여러 땅을 주유했고, 이게 오늘날 미디어에서 백성의 삶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정몽주는 전쟁터에 직접 개입했고, 목숨을 위협받으면서도 일본과 명나라의 사신으로가 백성을 되려오고 외교 관계를 좋게 하는 등 실질적인 국가 이익에 일임했다. 마지막에 대세를 타지 않고 부족한 힘에도 고려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는 점에서 고려의 충신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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