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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운동,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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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운동,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되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혹은 광주민중항쟁(光州民衆抗爭)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민주화 운동이다. 대한민국 내 언론 통제로 독일 제1공영방송 ARD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그 참상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당시 광주시민은 신군부 세력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실행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해 발생한 헌정 파괴·민주화 역행에 항거했으며, 신군부는 사전에 시위 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다. 1995년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으로 희생자에 대한 보상 및 희생자 묘역 성역화가 이뤄졌고 1997년 '5.18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 1997년부터 정부 주관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대표적인 영화로 《꽃잎》, 《화려한 휴가》, 《26년》 등이 있으며, 2011년 5월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정식으로 등재되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뒤, 같은 해 전두환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였고 실권자로 떠올랐다. 1980년 초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K-공작 계획을 실행하여 언론을 조종·통제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4월 14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돼 대한민국 내의 정보 기관을 모두 장악했다.

1980년 5월부터 정치 관여 의도를 드러내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대한 반발로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같은 달 국회에서는 계엄 해제와 개헌 논의를 비롯한 정치 현안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정국 운영에 방해가 되는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계엄 포고령 10호를 선포하여 정치활동 금지령·휴교령·언론 보도검열 강화 등의 조치를 내렸다.

신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포함한 정치인과 재야 인사들 수천 명을 감금하고 군 병력으로 국회를 봉쇄했다. 5월 18일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 해제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일으켰다. 신군부부마민주항쟁 때처럼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하고, 공수부대 등의 계엄군을 동원해 진압했다. 신군부는 1980년 3월에서 5월 18일 직전까지 공수부대에 충정훈련을 실시했고, 5월 초부터 군을 사전 이동 배치하고 신군부에 반발하는 시위를 진압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5월 18일 16시 이후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닥치는 대로 살상·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면서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광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계엄군은 5월 21일 13시경 전남대학교와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한 후 철수했다. 이 날 저녁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 외곽도로 봉쇄작전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차량 통행자나 지역 주민들의 희생이 발생했다. 5월 27일 0시를 기해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해 무력으로 전남도청을 점령했다.

 

10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 운동 결과 사망자 166명, 행방불명자 54명, 상이 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 등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후 호남 전역에서 전두환과 신군부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높아졌다. 당시 신군부는 언론 사전검열을 실시하고 관제보도를 의무화하도록 해 언론을 장악하고 조종했는데, 주한미대사관과 주한미군 사령관 등 관련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한민국 내 언론이 미국이 신군부의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진압을 승인했다는 보도를 쏟아내자 학생운동권 내 미국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이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강원대학교 성조기 소각사건을 비롯,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발생한 각종 민주화 혹은 반미 집회와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신군부 인사를 주축으로 한 제5공화국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 또는 김대중의 사주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왜곡했다. 1988년 제5공화국 비리 청산 분위기와 맞물려 열린 국회 광주진상특위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1993년 5월 13일 김영삼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 5·13 담화에서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면서 재평가가 가시화됐으며,1996년 검찰의 수사에 의해 신군부 인사의 쿠데타를 통한 집권 의도와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책임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1997년 대법원이 5·18, 12·12 진압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공식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됐다. 대한민국의 대법원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피고인(신군부)의 국헌문란행위에 항의하는 광주시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규정했다. 대법원은 전두환·정호용·이희성·황영시·주영복 등을 5·18 민주화운동의 진압 책임자로 판시했다.

 

영향과 평가

광주 민주화 운동은 끝내 전두환 정권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1987년 6월 민주항쟁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전두환 정권의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미국한국전쟁 때 같이 싸운 혈맹관계로 이해하던 종래의 대미관과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도 당시 운동권을 중심으로 재고됐다.

1980년 7월 4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했다. 서울의 학생시위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이 조종했다는 명목으로 김대중과 민주화 운동가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이는 후에 신군부가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대중 등은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미국의 강력한 사면 요청에 따라 감형됐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의 사주에 의해 발생한 소요사태로 조작했다. 하지만 1988년 5공 청문회를 거치고 1995년 12월 21일 국회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해, 계엄군의 진압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피해 배상을 위한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1995. 12. 21.)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7. 12. 17.)이 제정되면서 전두환 정권의 비(非)민주성과 폭력에 맞서 싸운 민주화 운동으로 다시 평가받았다.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광주학살 책임자들은 서훈이 취소됐으며 그 자격도 박탈됐다. 이 사건의 핵심 관련자인 전두환, 노태우는 1997년 대법원으로부터 징역형과 2천억 원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의의 및 교훈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과 민중의 의지를 대내외에 드러내었고 반민주, 군사독재의 야만성을 세계에 폭로함으로써 군사독재체제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으며,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들의 항쟁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며,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이 한 지역에 머물지 않고 전국적 저항과 연대로 이어질 때 비로소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다른 국가의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네스코는 광주민주항쟁은 1980년대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필리핀, 타이,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등지에서 일어난 여러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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