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왕후, 경원대군이 즉위하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섭정하다.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1501년 12월 2일(음력 10월 22일) ~ 1565년 5월 5일(음력 4월 6일))는 조선 중기의 왕후이자 섭정으로 중종(中宗)의 제2계비이다. 시호는 성렬인명문정왕후(聖烈仁明文定王后)이다. 1515년(중종 10년) 장경왕후가 승하하여 1517년(중종 12년)에 왕비로 간택, 책봉되었다. 1544년 대비가 되고, 1545년 아들 경원대군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섭정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국왕의 고유 권한인 인사문제에까지 개입한 그녀는 아들 명종(明宗)이 12세로 즉위한 1545년부터 1553년까지 8년간 수렴청정으로 섭정하였다.
파산부원군 정평공 윤지임(坡山府院君 靖平公 尹之任)과 전성부부인 이씨(全城府夫人 李氏)의 딸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아들 명종의 즉위 후 약 8년간 수렴청정을 맡았다. 수렴청정기간 중 자신의 친정 남동생인 윤원로, 윤원형, 친정 사촌인 윤춘년 등을 기용하였으며, 불교 중흥책을 펼쳐 보우를 중용, 선교양종과 승과를 부활시켰다.
그녀는 동생인 윤원형에게 정권을 쥐게 하고 인종의 외척이자 자신의 친척이기도 한 외척 윤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을 죽이고, 나중에는 윤원로를 귀양보내기도 했다. 그녀는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도 했는데, 1550년에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폐지되었던 승과, 도첩제 등을 다시 실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그에게 병조판서직을 제수하는 바람에 대신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불교를 장려하고 윤원형의 권력 남용을 방치하여 사림파 성리학자들로부터 악녀의 대명사로 낙인찍혀 후대에 이르러까지 악녀의 대명사 중 한사람으로 비판받았다. 능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태릉(泰陵)이다. 성렬대비(聖烈大妃)로 불린다.
왕자 출산 이후
1534년 자신이 낳은 유일한 아들이자 중종의 차남 경원대군을 낳기 전까지는 세자 호를 보호해 줬지만, 막상 경원대군을 낳은 문정왕후는 자신의 친아들에게 세자 자리를 앉히고 싶어하는 마음에 점점 세자 호를 경계하여, 자신을 언제 죽일 거냐는 독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야사에 따르면, 문정왕후가 동궁에 쥐를 이용하여 불을 질러 세자였던 인종을 죽이려 했다느니, 문정왕후가 대접한 다과를 먹고 인종이 죽었다느니 하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로 문정왕후와 인종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종은 계모인 문정왕후에게 효심이 지극하였다 한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야사일 뿐이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인종을 홀대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찾기 어렵다.
문정왕후는 원래 자녀를 5명 낳았으나 그 중에 아들은 왕자 환(명종) 하나 뿐이었다. 그것도 34세라는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다. 그녀는 아들을 애지중지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간섭과 매질이 심하였다. 이는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위한 뒤에도 계속되어 명종을 괴롭혀 유약한 인물로 만들고 만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자 그녀의 친형제인 윤원로와 윤원형은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계략을 세웠다. 그러나 세자의 외숙 윤임이 이를 저지해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녀가 명종을 낳았을 때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아들 인종의 나이는 이미 20세였다. 때문에 인종이 후사를 볼 수도 있었으므로 명종이 왕이 될 확률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인종에게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만약 인종이 그대로 죽게 된다면 경원대군의 왕위 계승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문정왕후는 그런 결과를 노리고 있었고, 마침내 이루어지게 된다.
왕자 환을 출산한 후부터 문정왕후는 왕자 환을 왕위에 앉히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세자를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윤임, 김안로 세력과 갈등했다. 그 과정에서 1537년 김안로가 문정왕후의 폐출을 기도하려던 사건이 적발되면서 왕에게 하소연하여 김안로를 유배, 사사시킨다.
세자 제거 기도
한번은 동궁에 불이 붙었는데 빈궁이 옆에서 잠자다 깨어 발을 구르면서 얼른 뛰쳐나가자고 세자에게 애원하였다. 그러나 인종은 동궁에 불이난 것이 계모인 문정왕후의 뜻이라고 짐작하고는 빈궁보고만 먼저 나가라고 하였다. 때마침 중종이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죽는 게 아버지에게 불효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불길을 헤치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문정왕후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는 야사일 뿐이고, 실제로 동궁전 화재 당시 인종은 깊게 잠들어 화재를 피하지 못하였는데 화재 현장을 목격한 인종의 후궁인 숙의 정씨가 직접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 인종을 구했다고 한다. 추후 숙의 정씨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귀인으로 오른다.
동궁전 화재 사건의 배후로 윤임은 문정왕후가 뜬소문을 조작해 사람을 혹하게 하고, 궁위(내전)을 모해하려는 증거가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증거가 드러났으니 문정왕후에게 법에 따라 사약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마음약한 인종은 계모가 그러지 않았다며 문정왕후를 변호했고 그녀는 극적으로 폐출의 위기를 모면하였다.
인종 즉위 이후
1544년 중종이 병사하였다. 그러나 보위를 재빨리 인종이 접수함으로써 경원대군 추대 시도는 실패한다. 이윽고 허약한 인종이 등극하였다. 이에 문정왕후는 대비가 되었는데, 야사에 의하면 문안차 대비전에 들어온 인종에게 문정왕후 윤씨는 어린 경원대군을 옆에 앉혀 두고 "우리 모자가 전하의 손에 죽는 날이 멀지 않았소. 그려, 언제쯤 죽이려 하오?"하고 협박하듯이 따져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런데 인종은 등극 8개월 만에 의문의 변사를 당하고 만다. 나중에 사람들은 인종의 죽음을 문정왕후의 소행이라 의심하였다. 일설에는 인종이 그녀가 건네준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는 설도 있다. 모진 학대로 인종을 괴롭히던 문정왕후는 모처럼 인자한 웃음을 띠며 새 왕 인종에게 아첨이나 하듯 떡을 손수 가지고 들어와 권하였고, 마음 약한 인종은 계모에게 효성을 다하는 뜻에서 독이 든 그 떡을 먹고 그만 급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종이 억울하게 죽은 사실은 궐밖으로 새어나가게 되었다. 인종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궁중의 높은 담을 넘어 저자 거리에까지 퍼져 나갔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설에 불과하고 실제로 인종승하의 큰 원인은 체질적으로 병약했던 원인도 있던데다 중종이 승하하고 빈전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문정왕후가 교태전 근처에 있는 통명전에 빈전을 설치하여 남편인 중종을 모시고 싶었는데 문제는 통명전은 협소한데다 인종이 머무는 강녕전과는 거리가 있어 인종이 자주 방문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무리하게 빈소를 지키다보니 병약한 체력을 이기지 못하고 승하했다고 대부분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