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역 벽서 사건, 윤임의 잔존 세력을 숙청하다.
양재역 벽서 사건이란 경기도 양재역의 벽면에 이런 내용의 벽서가 나붙었던 사건을 말한다. "위로는 여왕(문정왕후), 아래로는 간신이 날뛰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 윤원형은 이 벽서 사건이 윤임 잔당의 소행이라고 주장해 조정에 남은 윤임의 잔존 세력을 모두 숙청했다. 윤원형이 윤임의 잔존 세력에 사림을 포함시킴으로써 갓 조정에 진출했던 사림은 또다시 커다란 시련을 겪어야 했다. 양재역 벽서 사건을 계기로 을사사화를 피한 사림이 대다수 끌려와 형문을 당하고 유배, 파면당했다.(정미사화) 이 과정에서 사림파의 희생을 막으려는 이언적 등과 갈등, 이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언적을 정계에서 축출한다.
이어 윤원형은 1546년(명종 1년) 1월 자헌대부로 승진한 뒤 서원군(瑞原君)에 봉군되었고, 다시 중추부지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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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척리(戚里)의 한사람으로서 외람되게 공신의 대열에 참여하여 벼슬이 이미 종2품에 이르렀는데, 이제 대신이 신을 공이 있다고 아뢰어 다시 정2품에 올랐습니다. 벼슬을 이렇게 헤프게 준다면 조정의 명기(名器)가 이로부터 무겁지 않게 됩니다. 개정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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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진과 진봉을 사양하였으나 명종은 듣지 않았고, 곧 예조판서로 승진했고, 경연특진관을 거쳐 1547년 정헌대부 예조판서, 1548년에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후 친형인 윤원로와 권력을 다투다가 문정왕후가 그의 손을 들어주면서 이듬해 형을 유배시키고 그 뒤 윤춘년(尹春年) 등과 함께 윤원로를 공격하여 사사하였으며 완전히 권력을 잡았다. 이 일로 윤원로의 아들 윤백원은 그와 정적이 되었다. 1547년 동지춘추관사로 실록편찬에 참여하여 《중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찬을 도왔으며 이조판서를 거쳐 1551년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되었는데 신불(神佛)ㆍ복서(卜筮)를 깊이 믿어서 1551년 이후 여러 번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점쟁이의 말을 따라 취임하지 않았다. 그해 결국 의정부 우의정 겸 이조판서에 제수되어 나갔고, 1557년 영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우의정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