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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추모왕, 주몽 고구려를 건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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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추모왕, 주몽 고구려를 건국하다.

동명성왕(東明聖王) 또는 추모왕(鄒牟王, 기원전 58년 ~ 기원전 19년 음력 9월)은 고구려의 개국 시조이다. 재위: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이다. 《국사》(國史) 고구려본기를 인용한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에는 본래이 성은 (解)였다가 건국후 (高)로 고쳤다, 주몽(朱蒙)이라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등에는 추모(鄒牟)·중모(中牟)·중해(衆解)·상해(象解)·도모(都牟)·도모(都慕)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 부여의 건국자인 동명과 주몽은 별개 인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여의 금와왕 재위 시 금와왕의 아들 대소에 의해 핍박받던 주몽은 박해를 피해 남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탄생 설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및 《동명왕편》은 동명성왕의 탄생 설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주몽 설화는 고구려여를 병합하여,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의 설화와 고구려의 건국설화를 짜맞춘 것이다. 역사학계에서는 부여의 동명왕과 고구려의 주몽을 다른 인물로 여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해모수주몽의 아버지로 등장하지만, 해모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만 등장하는 인물로써, 정작 고구려광개토왕릉비에는 고구려건국 이야기 중에 주몽은 하늘의 아들(천제지자)이자, 하백의 외손이라고만 서술되어 있을뿐, 해모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이 당대 고구려인들에 의해 새겨진 일차사료인 점을 감안하면, 해모수가 실존인물이었는지 사실여부를 명확하게 알 수 없다. 해모수의 '해'는 태양을 뜻한다. 즉, 천손을 의미한다. 따라서 해모수는 고구려의 천손의식이 의인화 된 결과물로 해석해야 한다. 일반적인 견해는 부여기원전 2세기경에 건국 되었으며, 건국자는 해모수가 아닌 동명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河伯)의 어여쁜 세 딸 유화(柳花) · 훤화(萱花) · 위화(葦花)가 더위를 피하여 청하(지금의 압록강)의 웅심연(熊心淵)에서 놀고 있었다. 이때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오다가 연못 안에 세 처녀의 가냘프고 아름다운 모습에 취하여, 세 처녀를 모처로 유인하여 술에 취하게 한 뒤, 문을 걸어 잠그고 사욕을 채우려 하였다. 훤화 · 위화는 힘을 다해 탈출하였으나, 유화는 그만 해모수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하백이 이러한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였다. 하백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술법을 겨루어 그의 능력을 시험해 본 뒤, 해모수유화의 결혼을 인정하여 유화를 하늘나라로 보내주었으나, 여전히 해모수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아니하였던 하백은 꾀를 써서 해모수를 다시 시험해보기로 하였다. 가죽부대에 들어 있던 술에 크게 취한 해모수를 주머니에 묶어 가둔 뒤에 올려보내었으나, 물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술에 깨버린 해모수가 크게 노하여 주머니를 뚫고 울면서 놓아주지 않으려는 유화를 버리고 홀로 떠나버렸다.

이에 하백유화에게 함부로 남자를 만난 것을 나무라며, 시녀 몇 명을 붙여준 뒤 귀양을 보냈다.

이후 동부여의 왕 금와왕이 우연히 우발수(優渤水)로 나들이를 갔다가 유화(柳花)를 만나고, 유화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금와왕유화를 궁궐로 데려왔다. 그런데 그녀를 향하여 햇빛이 계속해서 비치는 기이한 일이 계속되더니, 마침내 그녀는 잉태하였다. 하지만 유화가 커다란 알을 낳자, 이 소식을 들은 금와왕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기어 유화로부터 알을 빼앗아 돼지우리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돼지들은 이 알을 먹지 않았을 뿐더러 도리어 소중히 하였다. 그 뒤 금와는 소와 말이 짓밟도록 알을 길가에 버리기도 하였는데, 소와 말들이 알을 피해가자, 이번에는 새들이 쪼아 먹도록 들판에 놓아 두었다. 하지만 새들은 오히려 알을 품어 주었다. 때문에 금와는 도끼로 알을 내리쳐보기도 했지만 알은 온전하였다. 금와왕은 하는 수 없이 유화에게 알을 돌려주었다.

유화는 그 알을 따뜻하게 덮어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아이 하나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 아이는 날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라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이에 이 아이의 이름을 부여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인 “주몽”이라고 지었다. 주몽대소 왕자 금와왕의 7명의 아들보다 능력이 출중하여 그들의 시기를 받았고, 호시탐탐 그를 죽이려 하였다.

대소주몽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유화주몽에게 동부여를 떠나라고 충고하였다. 어머니의 충고에 따라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등 세 친구와 함께 동부여를 떠나 추격자들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엄리대수(淹利大水)에 이르렀다.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엄리대수를 향해 주몽은 “나는 천제의 손자이며, 강의 신의 외손자이다. 지금 나를 쫓는 자가 뒤를 따르니 그 위험이 급한 데 강을 건널 수 없으니 도와 달라.”라고 하니, 이에 감응한 자라물고기가 물 위로 떠올라 띠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무사히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돌아가 버렸고, 추격자들은 강을 건너지 못해 더이상 쫓아오지 못했다 하는데, 역사는 이 사건을 가리켜 어별성교(魚鼈成橋)라 일컫는다.

 

부여에서 자란 주몽은 총명하고 활을 잘 쏘아 촉망을 받던 중 대소(帶素) 등 금와왕의 일곱 왕자가 그 재주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자 화를 피하여 이주하였다. 대소의 위협에서 무사히 벗어난 주몽은 유유히 남쪽으로 향하여 마침내 동명성왕이 졸본에 정착하여 졸본 부여왕(이름 미상, 건국 설화 중에 다른 설화에는 연타발이라고 되어 있다)의 둘째 딸(이름 미상, 건국 설화 중에 다른 설화에는 소서노라고 되어 있다)과 결혼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37년, 주몽은 졸본 부여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건국하고, 자신의 성(姓)을 ‘고’(高)라 했다. 그리고 국가의 위상을 일신하기 위해 대대적인 영토확장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주몽은 영토확장을 위해서는 우선 변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변방에 살고 있던 말갈족의 부락을 평정하여 말갈족이 더이상 국경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기원전 36년에는 비류수 상류에 있던 비류국(沸流國, ‘송양국’이라고도 한다)의 왕 송양(松讓)에게 활쏘기 경쟁으로 이겨서 항복을 받아내어 ‘옛 땅을 회복했다.’라는 뜻의 고구려말인 다물(多勿)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도주로 삼았다.

비류국을 정복한 주몽기원전 34년 마침내 졸본성과 궁궐을 완성하여 나라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 기원전 32년에는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를 보내 태백산(백두산) 동남쪽에 있던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였으며, 기원전 28년에는 부위염을 보내 북옥저를 정복하였다.

기원전 24년 가을 음력 8월에 부여에 남아있던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죽었다. 이때 금와왕이 그녀를 태후의 의례로써 장사지내고 신묘를 세웠다. 이에 주몽부여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어머니 장례를 성대하게 치루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토산물을 보냈다. 하지만 금와왕이 붕어하고 그의 맏아들이었던 대소왕자가 왕위에 오르면서(기원전 19년 전후) 고구려부여의 관계는 이전과 달리 급속도로 악화된다.

기원전 19년 여름 음력 4월에 주몽의 아들 유리부여에서 어머니 예씨 부인과 함께 도망쳐 돌아오자 주몽은 기뻐하며 그를 태자로 삼았으며, 그 후 5개월 뒤에 40살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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