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 단종복위운동 동참을 거절하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사육신과는 결별을 결심했다.
"자네와는 모시기로 한 주군이 달라져서 이제 가는 길도 어긋났지만 자네의 굳은 절의는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네. 만약 내가 자네와 같은 선택을 했더라면 나도 자네만큼은 아니라도 어느 정도 흉내는 냈을 것이네. 어른들이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는구먼.
'굼벵이는 더럽지만 매미로 변해 가을바람에 맑은 이슬을 마시고, 썩은 풀엔 빛이 없지만 그곳에서 나온 반딧불은 여름밤을 빛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깨끗함은 항상 더러움에서 나오고 밝음은 항상 어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한편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는 절친한 벗이었지만, 성삼문은 단종 복위 거사를 도모할 때 '비록 신숙주는 나의 평생 벗이긴 하나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또한 사육신의 동정론과 함께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에 대해 단종 즉위 후 권신들이 어린 왕의 눈과 귀를 가리고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방관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며 반박하였고, 하위지 등이 세종의 한글창제 당시 이를 반대, 비판한 점을 들어 문맹을 구하려던 세종의 의지를 반대하던 신하들과 사육신을 비유, 맹목적인 보수성을 비판하였다.
1456년(세조 2년) 성삼문, 하위지 등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고 사육신과 그 관련자들이 처형되었다. 신숙주는 정승들과 함께 입조하여 단종을 강등시키고 서인으로 만들 것을 건의했고,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사육신인 성삼문과 박팽년은 형문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신숙주를 향해 반역자, 배신자라고 규탄하였는데 이때 신숙주는 그들에게 그들은 단종의 충신이지만 금상(세조)의 충신은 아니라며 항변하였다.
신숙주는 세조 옆에서 그들의 고문 장면을 지켜봤으며 성삼문의 질타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사육신의 처형 직후 그는 변방의 축성을 강화하고 남해 해안가에 출몰하는 왜구를 격퇴하게 하였으며, 대마도 도주에게 조약문의 사본을 보내 경고하였다.
곧 이어 경상북도 지역에서 이보흠과 금성대군 등의 거사로 단종 복위 운동이 다시 발생하자, 탄핵 상소를 올려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그는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관철시켰다. 이때 그는 노산군의 부인 송씨를 자신의 노비로 내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세조도 그것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세조는 신분만 비(婢)일 뿐 노비로서 사역시킬 수 없다 하여 정업원(淨業院)에 혼자 살게 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산림에 은둔중인 학자들은 그가 다른 뜻을 품지 않았는가 하며 의혹과 조소를 퍼부었다. 김시습은 그가 행차할 때마다 나타나서 면박을 주거나 변절자라는 말로 조롱하기도 하였다.
1456년(세조 2년)에 병조판서로서 국방에 필요한 외교응대의 일을 위임받아 사실상 예조의 일도 관장하였다. 1456년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내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어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하였으며, 그해 여름 의정부우찬성이 되어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뒤 1457년 가을 의정부좌찬성(左贊成)이 되었다. 그 뒤 신숙주는 세조의 명을 받아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농업과 목축에 대한 간단한 백서인 《농산축목서》를 찬하기도 했다.
왜구와 여진족 토벌
1456년 야인(野人)들이 평안도와 함경도에 자주 들어와 노략질을 하므로 임금이 정벌하려고 하였으나 조정의 의론이 일치되지 않았다. 공만이 홀로 정벌할 수 있다고 하며 강경 토벌을 주장하자 세조는 '경의 말이 내 뜻에 꼭 맞다.'며 동의하였다. 그는 오래도록 변방을 약탈하던 여진족과 해안가를 통해 충청도까지 올라오는 왜구들에 대한 강경 진압과 엄한 처벌을 건의하였다. 그는 직접 자신이 출정하고 앞장서겠다고 하며 세조에게 군사를 일으킬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1458년(세조 3년) 9월 좌찬성으로 평안도도체찰사를 겸하였으며, 1458년 말 의정부우의정, 1459년(세조 5년)에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1458년(세조 4)에 우의정이 된 뒤에도 그는 10년간 예조판서를 겸하여 국가 외교에 있어서도 큰 공적을 세웠다. 이는 좌의정이 된 뒤에도 예조판서를 겸하게 된다. 그는 오래도록 예조판서로 재직하면서 명나라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맡는 등 외교정책의 입안자 겸 책임자로서도 활약했다. 또한 군사 지도자로서의 지도력이 있어서 1460년(세조 6)에는 강원도·평안도·함길도 도체찰사 겸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병력을 이끌고 2차례에 걸쳐 동북방면에 자주 출몰하여 약탈하던 모련위(毛憐衛) 여진족을 소탕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모련위 여진족과의 교전에서 북방 오진(五鎭)에 이르러 그는 직접 강을 건너, 산악지대로 여진족을 유인하여 뛰어난 전술을 구사하여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고 돌아왔다. 그는 장병을 여러 부대로 나누어 두만강변에 진을 친 뒤 여러 길로 한꺼번에 진격하도록 하여, 깊숙이 진격하여 야인을 토벌하고 돌아왔다. 그날 저녁 여진족이 밤을 타서 뒤를 공격해 오자 영중(營中)에서 이들을 상대했으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히 대응했다. 그는 누워서 일어나지 않은 채 막료(幕僚)를 불러 시 한 수를 창화(唱和)하였는데 그 시에 '오랑캐 땅 서리 내려 변방은 찬데, 철기는 백리 사이를 누비네. 밤 싸움은 그치지 않았는데 날이 새려 하네. 누워서 북두성 보니 영롱히 반짝인다'라고 하였다. 야밤의 기습공격이었지만 장사들이 공이 이렇게 편안하고 한가한 것을 보고는 용기를 내어 오히려 동요하지 않았다.
그 방략(方略)을 가르쳐 주고 용기있는 자나 겁내는 자 모두 분발하게 하여 오히려 여진족을 역추격하여 그 다음날 여진족의 소굴을 완파하였다.
1461년(세조 7)에 이에 대하여 왕명으로 <북정록>(北征錄)을 저술하였다. 또한 남해안에도 병력의 파견을 건의하여 남해안을 약탈하는 왜구를 토벌하게 했다. 이후에도 해안가와 변방에 성곽을 수축, 개보수하고 화포류를 설치하여 미구에 있을 외침을 대비할 것을 상주하였다. 1품관이 되자 그의 공신 작위 역시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영의정 임명
1462년(세조 8년) 5월 20일 영의정부사로 승진하였다. 그의 영의정부사 임명 직후 사육신과 갈라선 것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어나자 일단 사임하였다가 다시 복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1464년 영의정부사직을 사직했다. 세조는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는 거듭 사직하여 물러났다. 1464년(세조 10년)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가 됐다. 1464년 7월 일본에 파견되는 통신사(通信使)가 되어 배편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7월 19일 일본 국왕 고나하조노가 병으로 죽었으므로 일본측의 대접은 소홀하였고 그해 12월 배편으로 귀국하였다. 1466년 9월 외직에 오래 머물렀던 공신 양정이 임기가 차서 중앙에 소환되면서 세조가 북방에서 오래 근무한 일로 위로연을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서 양정은 취중에 세조에게 '상감께서도 오랫동안 왕위에 계셨으니 이제 편히 여생을 즐기는 것이 어떠냐'며 왕위를 선위(禪位)하라고 진언하였다. 신숙주 등은 그의 발언을 말렸으나 사태는 확대되었다.
양정의 취중 발언에 화가 난 세조는 승지를 불러 그 뜻을 말하고 황위를 세자에게 물려주려 하니 승지들은 한사코 이에 응하려 하지 않고 기세가 매우 험악하였다. 신숙주는 죽음을 각오하고 양위 사태를 말려서 무마하였다. 1467년에는 이시애의 난 때 난에 협력했다는 무고를 당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467년 건주위 토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그해 12월 군공 3등(軍功三等)에 녹훈되었다. 이후 그는 평안도와 함경도에 성곽을 쌓고, 각 군에도 성곽을 개보수하게 하여 미구에 있을 여진족과 몽골족 등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1467년 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