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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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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

 

요동정벌 계획

1392년 건국 지후부터 그는 요동정벌을 계획한다. 1396년 요동정벌의 방안으로 그는 그때까지 각 지역의 왕실측근과 개국공신들이 사적으로 보유하던 사병을 모두 혁파하여 국가의 정규군으로 개편하자는 사병혁파를 단행하였다. 그러자 사병을 중심으로 정변을 세우려고 계획한 이방원은 고려유신 그룹을 규합하여 노골적으로 반감을 품고 역습의 기회를 품게 되었다. 동시에 이방원은 정도전을 제거하기 위하여 명나라로 가는 사신 하륜, 설장수 등을 비롯한 반감을 품은 인사들을 사주하여 은밀히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획책하려 한다고 밀고하였다.

1396년 (태조 5년) 3월 과거 고시관에 임명되어 사양하였으나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5월 조유인(曹由仁), 이치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1396년 7월 27일 봉화백에 봉작되었다. 1397년 (태조 6년) 3월 상서사 판사(尙瑞司判事)로 공동 상서사판사인 조준과 함께 내관과 궁녀의 작호와 품계를 정하여 올렸다. 1397년 명나라의 사은사가 가지고 온 자문(咨文)에서 명나라는 그를 '조선의 화(禍)의 근원'이라고 지적했다. 동시에 조선 조정에 정도전의 해임과 요동 정벌을 중단하라고 경고했다. 요동 정벌을 목적으로 명나라와 싸우기 위해 왕족들과 여러 호족으로부터 몰수한 사병들을 새로 신설한 의흥삼군부에 병합한 뒤 그가 지은 진도(陳圖)에 따라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도전의 개혁과 명나라와의 전쟁 준비는 같은 개국공신인 조준 등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끝내 결별하게 되고 만다.

 

요동정벌 계획 실패

그해 4월 요동정벌 계획을 명나라에 누설한 설장수와 권근의 문책을 요구하였으나 불문율로 부치고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6월 정도전은 확보한 병력으로 남은과 함께 양주목장에서 대대적인진도훈련을 하면서 이성계에게 출병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조준의 강력한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그해 12월, 다시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주군의 구획을 확정하고 성보를 수리했으며 비밀리에 사람을 파견하여 평안도, 함경도 일대의 인구 수와 군관 수를 점검하고 되돌아왔다. 그해 10월 가례 도감(嘉禮都監) 제조에 임명되었다. 1398년초 그는 왕에게 상무정신을 함양할 것을 건의하고 병법과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정벌의 준비를 마무리한다. 바로 그는 태조에게 절제사를 혁파하여 관군(官軍)으로 합치고, 사병을 모두 압수하며, 왕자와 공신들이 나누어 맡고 있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게 하고, 개인이 거느린 사병 집단을 국가에 귀속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정변과 최후

1398년(태조7)음력 8월 그는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자신의 아들들을 변방으로 보낸 것을 인용하여 이방원은 전라도로, 이방번은 동북면으로 보내야 된다고건의하여 태조의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파견을 거부하고 민무구, 민무휼 등과 함께 정도전 암살을 기도하였다. 10월 6일 정도전은 송현에 있던 남은의 첩의 집에서 남은, 심효생, 이직 등을 만나 술을 마셨다. 그가 남은의 집에서 술을 마신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방원은 즉시 소수의 결사대를 이끌고 남은의 첩의 집으로 향한다. 정도전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세운 일로 인해, 이방원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방원은 그가 한씨 소생의 모든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 들인 후에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죽일 계략을 세웠다고 누명을 뒤집어 씌워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정도전이 아니라 태조 이성계가 한 일이고, 정도전이 왕자들을 암살하려 한 계략의 실체는 사실무근 이다.《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최후에 이르러 정도전은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승자에 입장에서 이방원이 비열한 인물로 폄하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뒤에 그와 아주다른 내용을 실어 놓았다. 정도전 아들 "아버님 지금 나가시면 죽을 것 입니다."

정도전 "됐다. 나도 살만큼 살았고 내가 죽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또 《삼봉집》에는 그가 이방원의 칼에 맞기 직전 자신의 삶 최후를 정리하는

'자조(自嘲)’라는 시를 남겨 영웅호걸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操存省察兩加功 / 조존과 성찰 두 곳에 온통 공을 들여서
不負聖賢黃卷中 /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다네.
三十年來勤苦業 /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 놓은 사업
松亭一醉竟成空 / 송현방 정자 술 한 잔에 그만 허사가 되었구나.
 - 정도전 <자조>

 

정도전의 두 아들 정영과 정유(鄭游)는 아버지를 구하러 달려가다가 살해되고, 얼마 뒤 조카 정담(鄭澹)은 큰아버지와 사촌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집에서 자살했다. 맏아들 정진은 당시 태조를 수행하여 삼성재(三聖齋) 방문 길을 수행하여 안변군 석왕사에 체류 중이라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하였다.

 

사후 평가

정도전의 묘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봉화 정씨 을류보에 경기도 광주 사리현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유형원의 '동국여지지' 과천 현조에는 현동북 18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정도전 사후 그의 업적은 폄하되었다. 정도전이 시행한 사병 혁파와 과전법 정책에 크게 반발했던 조준은 그가 죽자 정몽주가 정도전의 음해로 죽었다며 복권을 상소하였다. 조준의 상소는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태종 때 가서 받아들여져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으로 추상되어 영의정부사에추증 되었다. 정도전 사후 동생 정도복과 매제 황유정은 연좌되지 않고 계속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고, 아들 정진은 1411년 조영무, 안경공 등의 건의로 복직하여 판 나주목사로 기용되었고  세종 때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또한 정도전의 증손인 정문형은 세조 때 좌익원정공신 1등에 녹훈되고 관직은 우의정에 이르렀다. 태종 이방원은 그를 폄하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몽주를 현창하였는데, 이는 태종의 아들 세종이 정몽주의 제자 권우의 문인이었고, 세조 때 사림파가 관직에 진출하면서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되었다. 동시에 정몽주의 라이벌인 그는 불이익, 폄하의 대상이 되었다. 후대에 이르러 그는 오히려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로 또는 단지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인식되었다. 선조 때 정여립의 난의 가담자 중 도피자의 이름을 알수 없자, 관청에서는 도피자의 이름을 일부러 삼봉이라 지어 그를 조롱하였다. 광해군 당시 허균이 그의 시문을 애호하였다는 이유로 허균은 역모로 몰려 사형당한다. 그는 정조 때 가서야 정조가 그의 저서인 《삼봉집》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서서히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빠진 글들을 수집하고 편차를 재구성하여 수정 《삼봉집》을 간행하였다. 1865년(고종 2년) 9월 대비조씨의 건의로 다시 공신 칭호를 돌려받았다. 1865년 고종은 경복궁을 중건하고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으며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뒤 고종은 후손들이 사는 경기 양성현(안성군 공도면, 평택시 진위면)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고종은 정도전의 조선 건국과 제도와 법령 마련, 체제 정비 등의 치적을 기려 유종공종(儒宗功宗) 현판을 특필하여 하사하였다.

사당은 1986년 4월 경기도유형문화재 132호로 지정되었다. 불천지위(不遷之位)에 추대되었고, 그의 묘소가 실전되어 1872년(고종 8년) 왕명에 의해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1872년 개국공신으로 공식 복권되고 이듬해 관직과 작위가 회복되었다. 1873년(고종 10) 남인 인사들에 의해 이현일, 윤휴, 한효순, 목내선, 정인홍, 정도전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신원 상소가 올려졌다.

이에 면암 최익현과 중암 김평묵은 강하게 반발하였고 복권을 막기 위해 노력하했으나, 고종은 정도전 복권을 강행하였는데, 이는 정도전이 조선왕조건국에 끼친 공로를 추앙하여 복권을 한 것으로, 기존의 조선왕조에서 복권이 된 사람들인 김종서, 황보인, 사육신, 남이, 조광조 등의 경우와 다른 점이다.

 

현대

196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는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추상함으로써 다시 그에 대한 폄하가 시도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 재평가 여론이 나타났다. 2003년 삼봉 정도전 기념사업회가 출범하였다. 2003년 11월, 2007년 12월 정도전 재평가와 그의 학문연구를 위한 삼봉학 학술회의가 열렸다. 정도전의 묘가 경기도 과천현 10리 동쪽에 있다는 전설과 소문을 근거로 과천 일대의 야산을 탐사한 결과 목이 잘린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과 함께 많은 양의 고급 조선 백자가 함께 발견되었다. 정도전 사당에는 그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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