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다간 조선의 명재상
영의정 최후, 사후
다시 영의정에 보직되었다가 1598년 명나라 장수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정인홍 등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이후 학문 연구에 몰두하며 그 역시 정경세 등의 문인들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영남남인을 형성한다. 이에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한 그는 조용히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그 후 2년 만인 1600년에 복권되어 정부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1604년 (선조 37) 호성(扈聖) 공신에 책록되었다. 1607년 5월 31일(음력 5월 6일)에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당을 병산서원 뒤에 세우고 여산(廬山)의 퇴계묘(退溪廟)에 함께 모셨다.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호계서원(虎溪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 남계서원 삼강서원 도남서원 빙계서원 등에 위패가 모셔져 제향하게 되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문충공(文忠公)이 되었다.《선조실록》에서는 편찬자의 평으로, 재상으로서의 그릇이 작고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치지 못해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면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에게 바른 말을 고하지 못하여 대신다운 풍절이 없었다고 하는 등, 그의 성품에 대한 단점도 기록되어 있다.
기타
1589년 당시 남이공과 북인계열로부터 계속 비난을 받고 공격대상이 되었다. 당시 이산해의 아들 이경전이 이조에 천거되자 당시 영남 사람 정경세가 전랑으로 있었는데, 이경전이 추천되는 것을 막고자 이렇게 말했다.
"이경전은 유생 때부터 남에게 비방을 많이 들었으므로 이조에 끌어들여서는 안된다."
이 말을 듣고 이산해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모두 크게 노했다. 이 발언의 진원지로 이산해는 유성룡을 의심하였다. 이후 남인 중 유성룡 계파에 대한 그의 분노와 불만은 한층 더해갔다. 그때 이덕형이 재상으로 있었는데,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창석 이준에게 이렇게 청했다. 당시 이덕형은 남인이었다.
"자네가 경암(정경세의 자)에게 말하게. 만약 이경전이 전랑에 천거되는 것을 막으면 반드시 큰 풍파가 일어날 터이니,이는 조정을 편안하게 하는 도리가 아닐세. 이는 내가 사사로이(이덕형의 처남이기도 하다.) 하는 말이 아닐세."
이준은 정경세와 고향이 같고, 이경전은 이덕형의 처남인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정경세는 듣지 않았다. 이산해는 그를 의심했고 그를 탄핵하도록 사주한다.얼마 뒤 대간 남이공이 유성룡을 참혹하게 탄핵했다. 이중환에 의하면 당시 이 탄핵을 두고 '정경세는 본래 류성룡의 제자였으므로, 이산해는 유성룡이 정경세를 사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 그러므로 남이공을 시켜 류성룡을 탄핵하도록 한 것이지, 류성룡에게 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고 보았다. 서애 유성룡이 17살 때 <양명집>(陽明集)을 구해 읽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에서 양명학이 처음부터 금기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성룡의 스승 이황은 양명학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황은 <전습록변>(傳習錄辨)에서 양명학을 '사문(斯文·주자학)의 화'라고 비판했다. 그가 양명학을 '사문의 화'라고 비판한 다음부터 금기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에는 양명학의 핵심인 '치양지설'(致良知說)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으니 <전습록> 전체를 보지 못하고 비판한 셈이 된다. 스승인 이황이 양명학을 이단으로 규정하자 그는 양명학에 대한 관심을 끊고 이를 이단으로 생각하게 된다.
일화
명종 말기와 선조 초기에 이이와 이준경이 갈등할 때 그는 이준경을 지지했다. 그 뒤 선조 즉위 초 신진 사류의 한사람인 이이의 거침없는 발언과 비판에 염증을 느낀 사람 중에는 이준경도 있었다. 원로대신들 중 허엽과 이준경 등은 율곡을 예절과 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분을 터뜨렸다.
이준경의 친구 중에는 백인걸이 있었다. 율곡 이이의 솔직함과 냉정함에 화가 난 이준경은 백인걸을 찾아가 항의를 한 일도 있다. 한번은 이준경이 백인걸을 찾아와 "자네가 추천한 이 아무개라는 인간이 왜 그 모양인가? " 하고 드러내놓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 이준경이 죽음에 이르러 일부 사림을 자처하는 자가 당파를 만들어 조정을 위기로 몰고 갈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이와 함께 그는 이준경의 상소가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이가 계속 이준경을 공격하며 '죽음에 이르러 그 말이 사악하다'고 성토하자, 사림에서 이준경의 삭탈관직을 청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다. 그는 이무렵 이조 정랑이 되어 이준경(李浚慶)의 관직을 삭탈함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였으며, 인성(仁聖) 대비가 죽었을 때 예조에서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였으나 유성룡은 선조가 명종의 후계자 자격으로 왕위를 이었음을 주장하며 적손(嫡孫)의 예를 따라 3년설이 타당함을 주장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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