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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정치활동, 탄핵, 파면, 복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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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정치활동, 탄핵, 파면, 복직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반

1593년(선조 26년) 그의 나이 25세 때 한반도 최초 시평론집인 《학산초담》을 지었고 이듬해인 1594년(선조 27년)에는 정시문과(庭試文科)의 을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오른 후 (明) 사신을 접견하는 접반사(接伴使)로 파견된 심희수와 형 허봉에 이어 그해 4월 접반사(明) 사신을 수행하고 되돌아왔다. 그해 5월 다시 (明) 사신 접견에 파견된 원접사의 수행원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바로 설서(說書)를 지냈고 얼마 뒤 정6품 예조좌랑으로 뛰어오르고 (明)에 다녀와 병조 실세인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년)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황해도 도사가 되었으며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황해도에 있을 때 기생을 가까이 한다는 이유로 탄핵받고 파면당했다. '경창(京娼)을 데리고 부임했고 중방(中房)이라는 무뢰배를 거느리고 왔다'는 것이다. 파직 후 허균은 바로 복권되었다. 1597년 3월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급제를 하여 종3품으로 승진하였다. 중시에 합격한 관료는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陞進)이 관례였으나 그에게는 인사 불이익이 가해져 종3품 직책이 부여된다. 1598년 황해도 도사(都事)로 부임하였다. 이때 한성부에 있던 그의 애첩인 기녀가 황해도 임지로 와서 그의 수발을 들었다. 그러나 한성부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하였다는 탄핵받고 여섯 달 만에 파직되었다. 뒤에 복직하여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형조정랑 등을 지냈다. 1598년 10월 병조정랑이 되었다.


정치 활동 (임진왜란 직후)

1599년 3월 병조좌랑을 거쳐 그해 5월 다시 황해도 도사로 나갔다. 그러나 그해 12월 한성부의 기생을 데리고 간 일로 사헌부사간원에게 계속 탄핵받고 파직당하고 만다. 1600년 복직, 춘추관기주관(記注官)과 세자시강원의 낭관과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그해 말 장생전(長生殿) 낭청이 되어 의인왕후의 국장도감(國葬都監)과 빈전 행사에 참여하였다. 의인왕후의 국장에 참여한 공로로 1601년 5월, 특별히 가자(加資)되었다.

1601년(선조 34년) 충청·전라 지방의 세금을 걷는 전운판관으로 부임한다. 전운판관이 되었을 때는 부안의 유명한 시인이자 기생인 매창(梅窓)과 교류한다. 둘은 정신상 일에 중점을 두는 관계였다는 설과 매창이 그의 첩이었다는 설이 전한다. 후일 허균은 1609년(광해군 1년) 매창에게 쓴 편지에 “그대는 성성옹(惺惺翁)이속세를 떠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분명히 웃을 걸세”라고 쓴다.

매창에게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겠다는 약속한 사정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약속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 그만큼 위험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허균은 이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한다. 1601년 11월 형조정랑이 되어 내직으로 되돌아왔고 1602년병조정랑이 되었다. 그해 5월, 전에 세자시강원으로 있을 때 종1품 대신인 좌찬성 심희수를 시강원의 낭관인 그가 물러가라고 했다는 이유로 사헌부지평 윤경(尹絅)에게 탄핵받고 추고당했다.1602년 성균관사예(司藝),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으며, 동년 (明)에서 파견되는 사신을 맞는 명사 원접사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明) 외교관들을 상대하였다.


탄핵과 파면, 복직

이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1604년(선조 37년) 7월성균관 전적(典籍)이 되고 같은 해 9월 수안군수(遂安郡守)가 되었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다고 암행어사에게 다시 탄핵받아 벼슬에서 사퇴하였다.1606년 4월에 원접사 유근(柳根)의 추천으로 (明)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에 임명되자 종사관으로 (明) 사신 주지번을 만나 사서육경과 고전을 막힘없이 대화하며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주지번에게 그동안 보관하던 누이 난설헌(蘭雪軒)의 시선집을 명 사신으로 온 주지번에게 주어 그녀의 사후 18년 뒤에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출간된다. 1607년(선조 40년) 상의원정(尙衣院正)을 거쳐 그해 봄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갔다. 1606년 난설헌의 시가 출간되자 조선의 문화를 에 알린 공로로 특별히 삼척부사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재직 중 부청 근처의 법당에 출입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목격되어 석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하고 참선한다는 이유로 1607년 5월 사간원사헌부에서 탄핵받았다. 그러나 선조듣지 않다가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탄핵이 계속되자 쫓겨났다.

그해 음력 5월 6일 숭불(崇佛)했다 하여 파직되었으나 얼마 뒤 종삼품 내자시정(內資寺正)으로 임명되었다. 1607년 7월 복직하여 내자시정(內資寺正)이 되고 그해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12월 공주 목사로 부임하였으며, 《국조시산》을 편찬한다. 공주 목사로 기용되었을 때는 양반가의

서자 무리와 얼손(孽孫)들과도 호형호제하면서 가까이 터놓고 지냈고 또다시 파직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고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을 두터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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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보기] - 허균, <홍길동전>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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