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훈민정음 창제, 과학을 발전시키고 유교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다.
가정의 불행
재위 초반에 장녀 정소공주가 요절하고, 재위 후반엔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이 잇따라 요절을 하게되어, 세종과 소헌왕후는 비탄에 빠졌고 곧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이들의 명복을 비는 등 불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이어 소헌왕후 마저 승하하면서 그는 생애 후반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조선의 건국 이념은 유교 성리학이었기에 유학자들의 반발이 거셌으나 세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였으며, 먼저 죽은 가족들의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 태종에게 걱정을 샀던 세종은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각종 질병(중풍, 요로결석, 노안)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번 세자의 섭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무산되었다.
최후
그러나 세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제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1445년부터 세자 향에게 섭정을 하도록 했다.《세종실록》을 보면 집권 후반부에는 이런 각종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음이 기록되었다. 세종은 대식가였고, 몸집이 비대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세종이 걸린 중풍은 현대의 의학 용어인 뇌경색과 뇌출혈을 포함하는 용어로서 뇌경색은 비만으로 인한 혈관 내 콜레스테롤 수치 증가로 인하여 발병하며, 뇌출혈은 뇌경색 직전인 상황에서 고혈압이 있으면 발병하게 된다. 1450년 음력 2월 17일 (양력 3월 30일) 54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임금이 영응대군(永膺大君)*세종의 막내아들, 세종의 8남]집 동별궁에서 훙하다.[*1450년 음력으로 2월17일 별세](후략) -- 세종실록 127권, 32년(1450경오/ 명 경태 1년) 2월17일(임진)1번째 기사 지중추원사 이선 등을 북경에 보내 부고를 고하고 시호를 청하다. (전략)국왕의 성은 이씨(李氏)요, 이름은 도(祹)이며, 자(字)는 원정(元正)이니, 공정왕(恭定王)[*태종]의 세째 아드님이었습니다. 어머니 비(妃)는 민씨(閔氏/*원경왕후)이니, 홍무(洪武) 30년[*서기1397년 정축] 4월 10일[음력]에 낳으셨습니다. 자람에 미쳐 충녕군(忠寧君)에 봉했는데, 천품의 자질이 영예(英睿)하고 심중하고 후하며, 배우기를 즐겨하고 게으르지 않으셨습니다.(후략) -- 세종 127권, 32년(1450 경오/ 명 경태 1년) 2월22일(정유) 1번째 기사
참고로 다른 한자의 공정왕(恭靖王)은 태조의 2남(방과)이며, 태종의 형이었던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이다.(定宗 /*'정종'이란 묘호는 숙종 7년, 1681년에 받았다.)
사후
"그윽이 생각하건대, 천지의 큰 덕은 비록 다 형용하여 말할 수 없지마는, 신자(臣子)의 지극한 정리(情理)로서는 다만 미덕(美德)을 나타내는 데에 간절하므로, 삼가 상헌(常憲)에 따라서 이에 휘칭(徽稱) 을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황고 대왕(皇考大王)께서는 제성(齊聖) 광연(廣淵)하시고 총명(聰明) 예지(睿智)하시어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을 바탕으로 정치하는 근원을 깊이 연구하고, 밤이나 낮이나 정성을 다하여 정치하는 방도를 넓혔습니다.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덕화(德化)를 일으켰으며, 농사를 권장하고 형옥(刑獄)을 가엾게 여기었습니다. 조(祖) 를 높이고 종(宗) 을 공경하는 정성을 다하고,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의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구족(九族)은 실로 인륜(人倫)을 돈독히 하는 일에 한결 같았고, 조민(兆民)은 태평한 정치에 다 포용(包容)되었습니다. 예절이 갖추어지고 풍악이 조화(調和)되니, 문치(文治)는 일월(日月)처럼 빛나고, 가까운 곳이 편안하고 먼 곳이 엄숙하니 위무(威武)는 풍정(風霆)처럼 떨쳤습니다.
수방(殊方) 에서는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정성을 바치고, 중국(中國)에서는 칭찬하고 권애(眷愛)하는 은총(恩寵)을 베풀었습니다. 좋은 상서[貞符]가 자주 응하고, 칭송의 소리가 번갈아 일어 났습니다. 과연 30년간 태평의 성대이요, 진실로 천 년 사이에 만나기 어려운 행운입니다. 바야흐로 아버지께 만세(萬歲)까지 계실 것을 믿었는데, 어찌 하늘이 일조(一朝)에 무너질 줄을 생각하였겠습니까? 부비(付卑) 의 어려움을 길이 생각하니, 호곡(號哭) 벽용(擗踴) 하는 슬픔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에 추숭(追崇)하는 전(奠)을 거행하여, 애모(哀慕)하는 마음을 조금 펴려고 합니다. 삼가 옥책(玉冊)을 받들어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란 존시(尊諡)와 ‘세종(世宗)’이란 묘호(廟號)를 올립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의령(懿靈)372) 은 깊은 감찰(鑑察)을 내리셔서 빛나는 옥책(玉冊)을 받으시어 대대로 영구히 전하는 홍명(鴻名) 을 누리고, 순희(純禧) 를 거듭 주셔서 무궁(無窮)한 보조(寶祚) 를 말없이 도와주소서.” --- 문종실록 1권, 즉위년 5월 21일 (갑자)
세종은 죽어서도 부왕인 태종의 곁에 있고자 하였으나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손자인 예종 때에 경기도 여주로 이장되었다. 그러나 이장 후 1년도 안돼 예종이 갑자기 사망하여 흉지가 아니냐는 논란이 나왔으나 곧 무마되었다. 세종의 능은 영릉(英陵)이란 이름으로 현재 경기도 여주시에 위치해 있으며 소헌왕후와 한 봉분안에 함께 묻혀있는 합장릉이다.
일화
조선 태종이 세종이 어렸을 때 독서를 멈추지 않자, 건강을 염려하여 세종의 책을 모두 숨겨 버렸다. 이 때 세종이 책이 없음을 보고 황급히 자신의 방을 뒤지다가 병풍 뒤에 있는 책 한 권을 발견한다. 세종은 태종이 모든 책을 돌려줄 때까지 그 책을 1,000번을 읽었다고 한다.
건강
세종은 비만한 체구에 육식과 학문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으며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1948년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권에서 그린 국가표준영정이나 이당 김은호(金殷鎬)의 영정과는 다른 모습이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활동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기(背浮腫)·소갈증(消渴症)·풍질(風疾) 등을 평생 앓았다. 후대의 사학자 이덕일은 그가 당뇨를 앓았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세종이 시각장애인이라는 견해도 있다. 세종실록 92권(1441)에서의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아파서 봄부터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걷기가 어려웠다." 등의 내용으로 세종이 시각에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고, 재위 32년 중 20여 년간은 시각에 장애를 느꼈으며 임종(훙서)하기 전 8년 동안은 거의 앞을 보지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 정사를 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세자에게 전위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었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기타
아버지 태종이 외척을 숙청한 반면 세종대왕은 이들과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정실인 소헌왕후는 세종의 고모부인 심종의 조카딸이다. 심종은 심온의 동생이다. 세종대왕의 세 번째 동서인 노물재는 세종의 이종 사촌 형제가 된다. 심온의 세 번째 사위 동지돈녕부사 노물재는 교하 노씨로 우의정 공숙공 노한의 아들이다. 또한 세조 때의 영의정 노사신은 그의 이종질이자, 처조카가 된다.
심온의 사돈이며 노물재의 아버지인 노한은 세종의 이모부로서, 태종의 장인인 여흥백 문도공 민제의 사위이기도 하였다. 처남인 심준은 외사촌 매제가 된다. 심온의 장남 영중추원사 심준은 민제의 셋째 아들인 지돈녕부사 여원군 민무휼의 사위가 된다. 형인 양녕대군의 17대손 이승만은 조선왕조를 경멸하고 증오하였으나, 조선의 인물 중 세종대왕과 정약용, 충무공 이순신은 유독 높이 샀다. 박정희 역시도 조선의 인물 중 세종대왕과 정약용, 충무공 이순신은 유독 높이 평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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